▲29일 필리핀 공연을 앞두고 프레스센터에서 단독인터뷰 중인 무용가 천명선박상건
이번 공연을 이끄는 무용가 천명선은 대구 출신으로 일곱 살 때부터 무용을 시작했다. 당시 작은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유난히 몸이 약한 소녀 천명선을 위해 무용을 권했다. 그렇게 창극단 박초양 선생 아래서 무용을 배우기 시작했다. 대학시절에는 무용단을 직접 창단했다.
스물다섯 살 때 재일동포와 결혼해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고향을 잊을 수 없어 대구에 전통무용연구원을 설립해 일본과 대구를 오갔다. 그러던 중 남편이 세상을 떴다. 홀로 춤에 빠져 젊은 날을 헤쳐 가던 천명선은 일본 교포들과 문화예술인들로부터 "당신은 일본에 남은 유일한 보석이다", "민단에서 계속 활동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결국 그렇게 일본에 남게 된 천 무용가는 민단과 함께 일본에서 재일한국인과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국 전통문화를 알리는 일과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방학 때면 고국에서 학생들이 찾아와 천명선 무용을 배우고 되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 2세들에게는 "우리 것을 아는 것이 타국에서 살아가는 데 가장 큰 자신감과 주체성을 심어준다"는 확신을 가르쳐 나갔다. 그러면서 그는 2000년부터 민단 카나가와현 본부 문화사업추진위원장으로 전면에 나서게 되었고, 지난해 7월부터는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등에서 무용 예술 아카데미 회장겸 지도교수로 이론과 실무를 병행해 나갔고 전통무용의 계승운동이라는 3박자 인생을 항해하고 있다.
무용가 천명선은 1997년 전주 대사습 전국대회 무용부 장원, 전국 국악 전통예술대회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국악계에 두각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후 각종 대회에서 상을 휩쓸던 그는 전주대사습 전국대회 무용부분 심사위원을 10년째 맡아오고 있고, 95년 이후 미국, 중국, 호주, 캐나다, 독일, 헝가리, 러시아 등 해외공연을 무려 100회 이상을 소화해냈다.
동양적 한과 부드러운 소통을 갈구하는 곡선미의 춤사위
천명선의 춤사위는 관객 가운데 특히 주부들의 눈물을 쥐어짠다는 점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그에게 잊을 수 없는 공연 가운데 한 대목인 일본 공연의 경우 일본 주부가 눈물을 훔치는 장면이 현지 방송에 방영된 것. 한국 전통무용의 독특함 가운데 하나인 가늘고 긴 곡선의 운율이 연출하는 동양적 메타포의 매력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는 일본인들도 재일 교포들도 동시에 눈물을 흘리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 일제 강점기의 서러움을 딛고 살아나는 춤사위인가 싶으면, 한편으로는 모진 세상을 헤쳐 가는 중년여성들의 모성애의 표현 같기도 하는 그런 한국 춤, 천명선의 춤사위가 갖는 매력이다.
이처럼 천명선의 춤은 한국 전통문화가 지니고 있는 끈끈한 한과 자연과 교감하면서 우려내는 서정성에서 그 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삶도 예술도 서로 밀착되었을 때 인간의 심금을 울리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자신의 삶을 한국 전통 서정과 한의 가락에 잘 호흡시켜 온 '천명선의 춤'은 무용가 자신은 물론 관객도 하나로 신명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강대국으로부터의 외침과 질기디 질긴 가난의 극복 과정이 전통적 소재로 등장하는 그이의 춤사위 장면 속에는 정녕 한국인의 심상을 넘어서 똑같은 자연환경 속에서 유목민의 삶을 살아온 아시아와 유럽 변방 소시민들에게 가슴 찡한 동질감을 갖게 한다. 그로 인한 정서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이 춤사위의 포인트이다.
이심전심으로 이어지는 잔잔한 울림과 역경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며 관객의 가슴에 던지는 메시지는 사뿐사뿐 건너뛰는 춤사위마다 저마다의 역사와 삶의 파도가 출렁여 온다. 제각기 파란과 굴절의 역사이지만 그것은 결코 격정적이지 않고 산경진수의 세계에 천착하는 삶의 극복의지와 예술승화의 동질감이 일치한다.
전통춤을 한국 대표 문화상품으로 자리매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