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을 거두어 달라는 신하들. 사진은 특정 사실과 관계없는 재연 장면입니다.이정근
편전에서 나온 이숙번은 기다리고 있던 대신들에게 임금과의 대화 내용을 공개했다. 어머니의 꿈 얘기를 하는 것으로 봐서 희망적이라는 관측이 우세했다. 태종 이방원은 어머니에 약했다.
"근일에 내사(內史)가 환도(還都)할 때에 전하께서 반드시 의장(儀仗)을 갖추고 그를 맞이해야만 하는데 국새가 없어서는 아니 됩니다."
하륜이 사신 환송연을 거론하며 임금을 압박했다. 때마침 명나라 내사(內史) 이원의가 들어와 귀국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명나라 사신이 귀국하면 영빈관에서 성대한 환송연을 베풀어 주는 것이 관례였다.
"인소전(仁昭殿)으로 나가겠다. 생(栍)을 알아본 뒤에 계책을 정하겠다."
어머니를 모신 사당에 들어가 점을 치겠다는 것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전위를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임금의 권위에 손상이다. 점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이용하여 체면을 세우려는 것이다. 인소전 방문은 점이 아니라 임금의 면피용이다. 생은 점을 칠 때 점괘를 적은 대쪽을 담아두는 통을 말한다.
"위의(威儀)에도 국새(國璽)가 없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하륜은 집요한 인물이다. 태종 이방원이 한발 물러서자 빈틈을 주지 않고 계속 밀었다. 마음 변하기 전에 결말을 보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인소전 방문에도 국새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륜은 인간 이방원의 심중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용의 발톱이 꼼지락 거리다
결국 임금이 왕위를 세자에게 전한다는 명령을 거두었다. 태종 이방원은 지신사겸상서윤(兼尙瑞尹) 황희, 소윤(少尹) 안순에게 명하여 국새를 받아 상서사(尙瑞司)에 들여놓게 하였다. 8일간의 지루한 줄다리기가 끝난 셈이다. 전위파동은 백성들에게 웃음거리였지만 태종 이방원에게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종친, 원훈, 기로, 문무백관이 창덕궁 뜰로 나아가 도열했다. 세자 양녕대군이 국새(國璽)를 받들고 전상(殿上)에 놓았다. 용상에 앉은 태종 이방원은 도열한 문무백관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봤다.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고 차가웠다.
"여기 반열한 신하들 중에 나의 후대를 지켜줄 위인은 몇이나 되고 누구누구인가?"
용상에 앉아 있는 태종 이방원은 도열한 대소신료들의 얼굴을 낱낱이 살피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자가 없는 것은 어인 일인고? 이 자는 자신의 권세를 위하여 나의 선위를 반겼단 말인가? 으음, 괘씸한지고..."
열기 가득한 호흡을 토해내던 태종 이방원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와 동시에 용의 발톱이 꼼지락거렸다. 피를 부르는 움직임이었다. 용의 발톱이 꼼지락거리면 피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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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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