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우미와 가이드레일의 도움으로 볼링을 치고 있는 임동식 씨.이대진
명동역 3번 출구. 여기 저기 설치된 볼라드를 '잘 피해서', 임씨는 매주 한 번 이상 볼링장을 찾는다. 구력 7년차인 임씨의 최고점수는 170점, 포 배거(4 begger : 네 번 연속 스트라이크) 경험도 몇 번 있다. 작년 전국체전에서 볼링이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어 서울시 대표로 출전하기도 한 임씨는 정작 볼링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몇 달 전에야 처음으로 볼링 핀을 만져보고 그 모양을 알게 되었다. 임씨는 소리와 손끝의 감각으로 볼링을 한다.
"공이 손에서 떠날 때 손가락 끝에 걸리는 느낌이 있어요. 그 느낌으로 스트라이크를 예감할 수 있죠. 핀이 쓰러지는 소리를 듣고 대충 몇 번 핀이 남았는지 알 수 있어요."
"1·3 존(zone)으로 잘 들어갔는데 아깝게 5번 핀이 하나 남았네요."
아무리 다른 감각에 의지한다고 해도 전맹인 임씨가 혼자서 볼링을 치는 것은 무리다. 시각장애인 볼링은 크게 전맹부와 약시부로 나뉘는데, 시력이 전혀 없는 전맹부는 레인의 방향을 알려주는 가이드레일과 경기의 진행상황을 알려주는 도우미가 필요하다. 실로암 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 볼링교실을 맡고 있는 안상용(30·사회복지사)씨는 설명해주는 사람만 있으면 시각장애인들이 대부분의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고 말한다.
"정안인들 코칭보다 좀 더 자세하게 가르치는 정도예요. 보여주지는 못해도 대신 설명만 잘 하면 시각장애인들도 정안인들처럼 볼링, 수영, 요가, 인라인스케이트 등의 레포츠를 배우고 즐길 수 있죠."
배우는 데도 개인적인 차이는 있다. 안씨는 선천적 시각장애인이나 취학 전 시력을 잃은 사람들보다 성인이 되어서 후천적으로 시각을 잃은 사람들을 가르치기가 더 어렵다고 말한다.
"예전에 볼링을 본 경험 때문에 더 힘들어 하세요. 제대로 안 되니까 화를 내실 때도 있고요. 반면에 선천적 시각장애인들은 볼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습관 때문에 오히려 학습능력이 뛰어나신 것 같아요."
후천적 시각장애인 오히려 더 힘들어 해
학습능력뿐만 아니라 일상생활도 차이가 난다. 출생이나 취학 전 시력을 잃은 사람들은 맹학교에서 보행이나 점자교육 등 사회적응 프로그램을 통해 장애를 스스럼 없이 받아들인다. 반면 성인이 되어 후천적으로 시력을 잃은 사람들은 시력을 잃은 뒤 몇 년 동안 집 밖을 나서기를 꺼려하는 경우가 많다.
"보는 것에 익숙했던 분들이라 많이 불편해 하시죠. 이분들을 위해 복지관에서 컴퓨터, 점자, 음악, 레포츠, 창업 등 다양한 사회재활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지만 참여하는 데 많이 힘들어 하세요. 특히 5년 이내의 장애를 가지신 분들은 도우미 없이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시지 못해요."
안씨의 말처럼 성인이 되어 후천적으로 시력을 잃은 사람들이 장애를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15년 전 전맹 판정을 받은 이영희(53·가명)씨는 집 밖을 나서는데 10년이 걸렸다. 갑자기 발병한 뇌수종으로 시신경이 마비되어 시력을 잃은 이씨는 수치심 때문에 처음 2년 동안 아파트 복도조차 나오지 못했다. 아버지의 설득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함께 성당에 다녔지만 그마저도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 끊었다.
이씨를 다시 세상 밖으로 이끈 것은 주변 사람들의 끈질긴 관심과 사랑이었다. "어느 날 수녀님이 집으로 찾아오셨어요. 문 밖으로 나오라고 6년 동안 설득하셨죠." 수녀님의 헌신적인 모습에 마음의 문을 연 이씨는 2003년 가을부터 사회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복지관에서 점자, 컴퓨터 등의 교육과정을 이수했고, 산책과 헬스 등 레포츠 프로그램도 열심이다. 일요일이면 수녀님의 소개로 알게 된 친구와 함께 빠짐없이 성당을 찾는다.
"요즘엔 오히려 외출을 못하는 주말이 싫어요. 몸도 더 아픈 것 같고요." 장애를 받아들이자 마음이 편해졌고 자연스레 외출도 잦아졌다. 이씨가 장애를 받아들이는 데 걸린 10년의 시간 동안 그녀의 유일한 벗은 라디오였다.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계속 라디오를 켜놔요." 라디오를 통해 평소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세상의 소식을 접했던 그녀는 요즘도 <손석희의 시선집중>(MBC·FM)과 함께 하루를 시작한다. TV에서 간혹 화면해설방송(DVS : Descriptive Video System)이 나오지만 이씨에겐 보여주는 TV보다 들려주는 라디오가 훨씬 편하고 좋다.
화면해설방송(DVS)이란 시각장애인을 위해 인물의 행동, 심리상태, 장면전환 등을 성우가 설명해주는 방송이다. 주로 평일 낮에 지상파 3사에서 재방송되는 드라마가 DVS로 송출되고 있다. TV에서 아무리 상세히 설명을 해줘도 라디오에 익숙해진 이씨에겐 TV가 낯설다. "옛날 탤런트는 아는데, 요즘 TV에 나오는 젊은 애들은 누가 누군지 얼굴을 모르니까 답답해요." 옛날 탤런트 중에서도 이순재씨를 좋아했다던 이씨는, 요즘 한창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고 있는 '야동순재'의 인기를 모르고 있었다. "글쎄요, <거침없이 하이킥>이 화면해설방송으로 나온다면 이순재씨의 연기를 한 번 들어보고는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