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스님은 죽어서 탑비를 남긴다

부처님 오신 날 문경 봉암사 가는 길 ⑥ 탑비를 찾아서

등록 2007.06.18 09:02수정 2007.06.18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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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사에는 각 시대를 대표하는 탑비가 네 기 서 있다. 지증대사 적조탑비는 신라시대 비석이고, 정진대사 원오탑비는 고려시대 비석이며, 상봉대사 정원탑비는 조선시대 비석이다. 그리고 서암 대종사비는 현대의 비석이다. 그러므로 봉암사에 가면 우리나라 불교 탑비의 역사적 흐름을 알 수 있다.

조선 중후기에 만들어진 상봉대사 탑비
조선 중후기에 만들어진 상봉대사 탑비이상기
봉암사 경내에서 보면 상봉대사 비가 가장 가까이에 있다. 상봉대사는 1627년 영변부(寧邊府)에서 태어나 1709년에 세상을 떠난 정원(淨源) 스님이다. 대사는 어려서부터 불교적인 성향을 보여 주었고, 1646년 선천장로(善天長老)에게서 머리를 깍고 계를 받았다. 완월(玩月)과 추형(秋馨) 두 대사에게 공부하고, 1656년 풍담(楓潭)대사에게 불법을 전수받았다.

이후 전국을 주유하며 선지식과 교류하고 불법을 가르쳤다. 희양산 봉암사에 이르러 도서(都序)와 절요(節要)의 과문(科文)을 지었으며, 화엄경을 좀 더 정밀하고 심도 있게 연구하였다. 비문의 표현을 빌면,

“경(經)에는 4과(科)가 있는데 그중 3과에 뛰어나, 글을 기준으로 그 뜻을 연구해서 3과를 분명히 하여(緣文究義 遂定三科)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뜻에 어둡지 않게 하였다.”



상봉대사 탑비는 이덕수가 찬하고 윤순이 썼다.
상봉대사 탑비는 이덕수가 찬하고 윤순이 썼다.이상기
스님은 1709년 지평(砥平)의 용문산에서 발병하여 2월 8일 입적하였으니 세수 83세요, 법랍 64년이었다. 상봉대사 정원탑비는 스님이 입적한 지 7년 후인 1716년 5월 이덕수(李德壽)가 찬하고, 윤순(尹淳)이 글씨와 전액을 써서 세워졌다.

귀부나 이수가 없는 비석형태로 단순하면서도 안정감이 있다. 비받침은 약간 다듬은 단층의 지대석으로 되어 있고, 머릿돌은 기왓골과 서까래를 새긴 지붕형태이다. 몸돌은 대리석에 해서체로 된 아름다운 글씨가 새겨져 있다.

비각 속에 모셔져 있는 정진대사 원오탑비
비각 속에 모셔져 있는 정진대사 원오탑비이상기
상봉대사비를 지나 동쪽으로 약 100m쯤 가면 정진대사 원오탑비가 나온다. 지증대사 적조탑비처럼 비각 안에 모셔져 있다. 그 때문에 가까이 가서 글씨를 보면서 내용도 알아보고 돌의 재질도 살펴볼 수 없어 유감이다. 비문은 한림학사 이몽유(李夢游)가 짓고, 글씨는 전서와 본문 모두 한림원 서박사(書博士) 장단열(張端說)이 썼으며, 글자는 섬율(暹律)스님이 새겼다.

정진대사(878-956)는 신라 말 고려 초를 살다간 대표적인 선승으로 이곳 봉암사를 중창하여 희양산문의 선풍을 드높인 분이다. 지증대사와 양부선사(楊孚禪師)의 법맥을 이어받았으며, 수제자인 형초선사(逈超禪師)에게 법통을 전수하였다.

정진대사 원오탑비는 이수와 귀부가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정진대사 원오탑비는 이수와 귀부가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이상기
스님은 878년 공주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왕씨이고 이름은 긍양(兢讓)이다. 고향의 남혈원에서 여해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였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는 말을 되새기며 산문에서 수도에 전념하였고, 산문을 나와 수행하면서는 선종의 본질을 알기 위해 노력하였다.


스님은 20세 되던 897년 계룡산 보원정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그 후 스님은 양부선사를 만나게 되는데, 비문을 찬한 이몽유는 그것을 자로와 공자의 만남에 비유하였다. 23세 되던 900년 당나라로 유학하여 25년 동안 설봉선사, 도연화상 등을 만나 선법을 배우고 선문의 거목으로 우뚝 서게 된다. 47세 되던 924년 귀국하여 은사 스님이 세운 백엄사에 주석하면서 선의 본질을 전수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비문이 잘 보존되어 글자 하나 하나를 확인할 수 있다.
비문이 잘 보존되어 글자 하나 하나를 확인할 수 있다.이상기
“지혜의 횃불을 계속 밝혀 繼燃慧炬之光
미혹한 중생들의 앞길을 제대로 인도하니 廣導迷津之路
선의 강은 이로써 막힘없이 흐르게 되었고 禪河以之汨汨
법의 산은 이에 우뚝 솟게 되었다. 法山於是峨峨”

광종 7년(956년) 8월19일 스님은, “이제 늙어 바람 앞에 등불이요 물 위의 거품과 같아서 더 이상 오래 지탱할 수 없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나는 떠나고자 한다”는 말과 함께 형초선사에게 다음과 같은 유훈을 남기고 입적하였다.

“너는 마땅히 선풍을 잘 지켜서 계속 그 밝음을 전하라. 선인들보다 더 빛나게 하고 법통이 이에 상응해서 단절되지 않도록 하라.”



서암 대종사비
서암 대종사비이상기
봉암사 출신의 또 다른 스님 서암 대종사는 20세기 불교계의 큰 스님이다. 서암 스님은 1917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홍근(鴻根)이었으며 예천 서악사에서 출가하였고, 문경 김룡사에서 금오 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

1938년 일본대학 종교학과에 유학했다가 1940년 귀국하여 다시 김룡사에서 정진하였으며 1942년부터 금강산 마하연과 사불산 대승사, 계룡산, 덕숭산, 가야산의 절에서 참선을 계속했다.

해방 후에도 참선과 포교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1972년에는 희양산 봉암사에 들어가 정진하였다. 1975년에는 조계종 총무원장이 되어 이판을 떠나 사판승으로 조계종의 행정을 총괄하였다. 1982년에는 봉암사 조실이 되었으며 희양선원을 종립 특별선원으로 만들었다.

1991년에는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이 되고, 1993년에는 조계종 종정이 되었다 그러나 1994년 총무원장 의현 스님의 전횡으로 인해 종단 분규가 발생하였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종정에서 물러난다. 이 후 스님은 조계종을 탈종하여 홀로 정진하였으며, 2001년에야 봉암사 조실이 되어 다시 조계종에 복귀하였다.

서암 대종사는 수행에만 열중한 대표적인 선승이다. 그는 한국 불교계의 전통인 문중이나 법맥 등을 가지지 않은 현대 불교계의 큰 스님이었다. 서암 스님은 2003년 3월 입적하면서 열반송을 요구하는 소장 스님들에게 ‘그런 거 없다’, ‘할 말 없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서암 대종사는 마지막 남긴 말씀대로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간’ 정말 큰 스님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스님의 일생은 굴곡이 많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서암 대종사비와 부도탑
서암 대종사비와 부도탑이상기
이런 큰 스님의 마지막 흔적이 바로 이곳 봉암사 뒷산에 남아 있다. 함허당 득통탑과 환적당 지경탑을 지나 석종형 부도가 있고 그 동쪽에 서암 대종사의 탑과 탑비가 흰색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귀부와 이수라는 전통적인 장식 가운데 국한문 혼용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서암 대종사비는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21세기의 대표적 탑비이다. 그리고 탑비 옆에는 연꽃 받침 위에 대종사의 석종형 부도탑이 나란히 서 있다.

서암 대종사비를 찬하고 쓴 사람이 지관스님과 기현스님임을 알 수 있다.
서암 대종사비를 찬하고 쓴 사람이 지관스님과 기현스님임을 알 수 있다.이상기
서암 대종사비는 스님이 입적한 지 일 년이 지난 2004년 3월 세워졌으며, 대표적인 학승인 가야산인 지관스님이 글을 짓고 금정산인 기현 스님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적힌 다음과 같은 문구가 스님의 위상을 말해 준다.

“서암 스님은 조계종의 종지를 선양하신 수행자요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해 일관된 신념으로 몸소 실천 궁행하신 정신적 지주였다.”

덧붙이는 글 |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문경 봉암사를 찾았다. 조계종의 대표적인 수도도량으로 초파일에만 문을 연다고 해서 어렵게 갈 수 있었다. 부처님 오신날 봉암사 풍경으로 여섯번 째 마지막 연재이다. 봉암사 문화유산을 통해 봉암사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려고 노력했다.

덧붙이는 글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문경 봉암사를 찾았다. 조계종의 대표적인 수도도량으로 초파일에만 문을 연다고 해서 어렵게 갈 수 있었다. 부처님 오신날 봉암사 풍경으로 여섯번 째 마지막 연재이다. 봉암사 문화유산을 통해 봉암사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려고 노력했다.
#정진대사 #긍양 #상봉대사 #정원 #서암대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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