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사이즈' '엉덩이사이즈'로 시작한 글쓰기

내 컴퓨터 입문은 '야한 채팅'이었다

등록 2007.06.15 12:05수정 2007.06.15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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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큰아이가 7살 때 남편은 갑자기 컴퓨터를 사자고 했습니다. 넉넉하지도 않은 살림에 무슨 컴퓨터냐며 막무가내 반대했지만 아이들 키우면 당연히 있어야 한다나요? 아직 한글도 모르고 컴퓨터 게임도 모르는 아이에게 꼭 필요하다며 컴퓨터를 사자는 남편을 이기지 못하고 카드 할부로 컴퓨터를 구입했습니다.


컴퓨터의 컴자도 모르고 산 컴퓨터가 나중에 알고 보니 너무 비싼 값에 샀다는 걸 알았지만 발품을 팔지 않고 동네 대리점에서 권하는 대로 산 내 잘못이었습니다. 발품을 팔았다 한들 컴맹인 내가 뭘 알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컴퓨터를 사긴 했는데 막상 컴퓨터를 해보려니 켜는 방법만 배웠지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막막했습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를 불렀습니다. 친구에게 컴퓨터를 좀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켜고 들어가는 것부터 자판 연습하는 것까지 자세히 가르쳐 주더군요.

그 다음에는 어느 사이트에 들어가 채팅을 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마냥 신기했습니다. 컴퓨터 속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맘대로 이야기를 하고 공주나 왕자 같은 아바타가 판을 쳤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다니 별천지였습니다.

친구는 내 컴퓨터 선생으로서의 첫 공부를 채팅을 가르쳐 줬고 착실한 제자는 선생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채팅을 했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가르쳐 주려면 재미있는 공부를 가르쳐 줘야지 친구가 가르쳐 준 공부는 늘 어제 한 공부 복습에 또 복습이었습니다.

사이트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일단 일대일 초대가 왔습니다. 승낙을 하면 상대방 남자와 단 둘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사람은 다른데 질문은 한결 같았습니다.


"남편이 잘해 주나요?"
"가슴 사이즈가 어떻게 되세요?"
"엉덩이 사이즈는 어떻게 되세요?"
"우리 만날까요?"

어제 다른 남자가 한 질문을 오늘 또 다른 남자가 똑같이 질문을 하고 그 다음 날도 사람만 달랐지 질문은 거의 같았습니다. 나는 대답을 착실히 했습니다. 남편은 잘해주는 편이다. 가슴 사이즈는 잘 모르고 그냥 사이즈 작다. 엉덩이 사이즈를 재봤어야 알지 어떻게 아느냐며 대답을 해주었고 상대남자는 재미없다며 더 야한 이야기를 꺼내곤 했습니다.


며칠을 해봐도 남자들의 이야기가 징그럽고 재미가 없었습니다. 아니 처음에는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다가도 꼭 나중에 남자들의 관심사는 사이즈, 사이즈, 온통 사이즈 이야기였습니다.

뭐 재미있는 게 없을까 고민하던 나는 독수리 타법으로 주소창에 '시인'을 쳐봤습니다.

내 운명이 그때 달라질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어려서부터 시를 좋아해서 늘 노트에 남의 시를 적어 예쁘게 색칠도 하고 직접 시를 써보기도 하며 늘 문학에 관심이 있었지만 어디에 써야 하는지도 모르고 살았던 나의 관심사였기에 '시인'을 적었고 그 시인이란 단어는 나를 어느 시인이 운영하는 인터넷카페로 친절하게 데려갔습니다.

신기한 세상이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시를 실컷 볼 수 있었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보고 울고 웃을 수 있었으며 조심스럽게 독수리 타법으로 한 글자 한 글자를 쳐서 내 의견을 올릴 수도 있다니 이보다 행복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날마다 되지도 않는 시를 써서 올려놓고 댓글을 기다리고 잘 쓰지도 못한 시에다가 태그를 배워 옷을 입혀서 뿌듯해 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시에 소질이 없음을 파악했고 좀 더 쉬운 생활글에 도전을 했습니다.

방송에 보내서 선물을 받고 그게 신기하고 즐거워서 또 글을 쓰고…. 그렇게 시작한 생활글이 전태일 문학상까지 받게 되었고 '포장마차 아줌마 문학상 받다'라는 제목으로 뉴스에도 나가고 신문에도 여러 번 나가서 스타 아닌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때 산 컴퓨터가 지금은 몸 곳곳이 아프다고 말썽을 자주 부리지만 요즘도 내게 많은 행복을 가져다주는 보물이 되어 내 곁에 머물고 있습니다. 나는 외쳐 봅니다.

'네 시작은 비록 가슴 사이즈와 엉덩이 사이즈로 시작했지만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한 문학으로 일어나리라'
#채팅 #시인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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