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어질 듯 낡았어도 여전히 내겐 신비의 성인 소금창고, 지난 겨울 포동에서 찍은 소금창고...이현숙
갯고랑과 갯바닥, 염전과 소금창고. 난 늘 그 풍경을 '영준이 오는구나' 하는 한마디 외침과 함께 떠올린다. 오빠의 행장은 옷 몇 가지를 둘둘 뭉쳐 보자기에 싼 옷 보따리 하나. 오빠는 늘 그 보퉁이를 옆구리에 끼고 나타났다. 넓은 염전과 소금창고가 있는 풍경을 지나 북망산 밑을 통과해 아기자기한 들판 샛길을 걸으면 우리 동네가 나온다.
그리고 소금을 실어 나르는 가시랑차(?)라는 게 있었다. 가시랑차는 쇠바퀴 위에 두꺼운 널판때기를 놓았고, 그 널판때기를 굵은 쇠갈쿠리로 쭉 연결한 소금을 실어나르는 기차였다. 그것은 좁은 선로를 따라 움직였는데, 때로는 소금자루가 수북이 쌓인 채 선로를 기어갔고, 때로는 텅텅 빈 채로 선로 위를 내달렸다.
그다지 위압적이지 않은 소금차였는데 가끔 사고가 났다. 우리 이웃동네 한 아저씨는 그 차에 치여 팔을 하나 잃었고, 또 한 아저씨는 목숨을 잃었다. 사고가 나던 날 밤, 우리 윗집에 사는 그 아저씨의 친척이 우리 집으로 초롱불을 빌리러 왔다. 사고 소식을 들은 엄마는 초롱불을 건네 주면서 말했다. "아무개처럼 큰 사고는 아니어야 할 텐데(아무개처럼은 팔을 잃은 아저씨를 지칭한 말)."
그런데 이튿날 아침 아저씨가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린 아이들이 다섯이나 되는 젊은 가장이었는데…. 장례식날 우리는 구경꾼처럼 서서 구경을 했고, 동네 어른들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장례를 거들었다.
이웃동네에 젊은 화장품 장사 아주머니가 있었다. 그 아주머니의 남편은 염부꾼이었는데 그만 노총각과 바람이 났다.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큰딸이 나보다 한 살 아래였다. 학교 가는 길 만난 큰딸은 자기 엄마는 화냥년이라며 거침없이 엄마를 향해 욕을 해댔다. 몇 년 후 그 애가 아버지와 동생들과 함께 소금창고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난 그 말을 전해준 동네 언니에게 자세히 물어보았다. 소금창고에서 어떻게 사느냐, 소금창고 안은 어떻게 생겼느냐. 그러나 호기심 가득한 내 물음의 답은 시원치 않았다. 아마도 내 환상이 워낙 컸기 때문이었으리라.
내게 소금창고는 성이나 보물창고처럼 환상의 공간이었다. 그것은 멀리서 봐도 거대해 보였고 그 안에는 갖가지 진기한 보물들이 숨겨져 있을 것처럼 신비해 보였다. 그러니 난 소금창고에서 사는 그 집 딸이 부러웠다.
내가 거기서 살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구경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허락이란 기대도 할 수 없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결국 가까이 가 보지도 못하고 난 훌쩍 어른이 되었다.
지난해 전남 신안군 임자도로 여행을 갔다가 소금창고 안을 볼 수 있었다. 텅 비어 있는 곳도 있고, 소금이 가득 들어 있는 곳도 있었다. '아 이렇게 생겼구나' 눈으로 보고 확인은 했지만 난 돌아서자마자 잊었다. 다시 환상 속의 소금창고로 들어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