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8일에 열린 한나라당 후보 정책비전대회한나라당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중 일부가 원하는 교육의 미래는 참담하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과열된 영어교육에 시달려야 하고 중학교 때부터 명문고 입시를 위한 경쟁에 시달려야 하는 광란의 풍토는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될 것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고귀한 가치 실현의 장'으로서의 교육은 이미 사라진 지 너무도 오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장'으로서의 벌거벗은 생존 경쟁의 논리는 앞으로도 거침없는 질주를 계속할 것이다. 지난 8일 진행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들의 교육 정책 토론회를 결과를 보면 그런 생각이 더 들게 된다.
교육으로 인생 역전의 드라마를 만들었다는 이명박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우리나라의 교육열, 그 실체는 무엇인가? 민족 특유의 '숭문주의(崇文主義)'의 전통인가? 아니면, 모든 국민들이 몸속에 '교육열'이라는 유전자를 지니고 태어나기라도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가진 것 없는 노동자 서민의 처지에서 볼 때 유일한 계층 상승의 통로는 바로 교육이다.
그렇기 때문에 잔업, 야근을 해서라도, 식당일을 해서라도 과외비를 마련해 자녀 교육에 아낌없이 투자하며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이 어미, 애비처럼 살지는 말아라."
소위 386세대 학부모도 초등학생 자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저기 저 청소부처럼 살게 된다."
이는 입지전적 신화의 주역 이명박 후보에게 너무나 뼈저린 경험이었나 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교육이야말로 인생 역전의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통로입니다. 끼니도 잇기 어려웠던 제가 여기까지 온 것도 바로 교육의 힘이었습니다."
하여, 그의 연설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돈이 없어 공부를 못 하는 사람은 없게 하겠습니다. 저소득층이나 장애인들이 돈 걱정 안 하고 학교 다닐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후보들도 현실 인식은 그리 다르지 않다. "학생들은 밤늦게까지 학원을 쫓아다니고, 늘어나는 사교육비로 가정경제까지 무너지고 있다"는 박근혜 후보의 현실 인식이나, "과거에는 가난한 집에서 수재가 났지만, 요즘은 부잣집에 수재가 난다"고 일갈하는 홍준표 후보의 현실 인식도 그 자체로는 훌륭하다.
홍준표 후보는 아예 "최근 서울 일류대학 신입생 가운데 상위 계층 20%의 학생이 전체 신입생 가운데 60%를 차지한다"는 구체적인 통계 자료까지 제시하였다. 하지만 훌륭한 것은 여기까지다.
아버지의 정책을 배반하는 박근혜
그토록 서러운 경험을 토로한 이명박 후보는 입시에 관한 권한을 대학에 넘기고(대학 본고사 실시), 중.고등학교에도 자율경영체제를 도입해 경쟁하는 환경을 만들겠단다. 박근혜 후보는 고교평준화 체제를 만들었던 자기 아버지의 뜻을 철저히 저버리고 16개 시도별로 고교평준화 여부를 주민의 자율 선택에 맡기겠단다.
고교평준화에 '하향평준화' 딱지를 붙이기, '자율성'과 '경쟁력'에 신비주의 전략 덧씌우기, 이제 하도 신물이 나게 들은 논리어서 어느덧 우리의 뇌리에도 '평준화=악, 경쟁력=선'의 공식이 스멀스멀 자리 잡고 있다. 고교평준화가 해체되면, 대입을 대학 자율권에 맡겨 본고사가 부활되면, 과연 돈 없는 자들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게 되고 가난한 집에서 수재가 나고 사교육비가 해결된단 말인가?
이명박 후보가 고교생이었던 60년대는 고교 입시뿐만 아니라 중학교 입시가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중학교 입학시험에 '엿을 만드는 재료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많은 학생들이 '무즙'이라 답하여 오답 처리 되자 수많은 학부모들이 무즙으로 만든 엿을 들고 교육청에 항의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초등학생들뿐만 아니라 중학생들도 경기고 등 세칭 일류고에 입학하기 위해 청춘을 저당 잡히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폐해를 일거에 없앤 고교평준화야말로 박정희 대통령의 거의 유일한 긍정적 업적이었다. (하필 자기 자녀가 고등학교 입학할 즈음에 고교평준화를 실시한 저의가 세간의 화젯거리였지만)
박근혜 후보가 고교생이었던 70년대는 대학 본고사 시절, 서울대 수학 본고사의 합격선이 100점 만점에 30점이었으니 그 위세가 얼마나 막강했는지는 지금의 50대 세대라면 누구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EBS 강사가 수능 출제를? 홍준표는 역시 엉뚱했다
홍준표 후보는 이번 토론에서도 엉뚱했다. 그는 입시와 사교육 문제의 해법으로 "EBS 방송내용을 그대로 수능 출제에 반영하도록 EBS 강사를 바로 수능 출제자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하루 종일 EBS 방송 강의만 틀어놓고 있으라는 이야기다. 이는 교육과정도, 교과서도, 단위 학교의 교육 철학이나 교사의 교육관도 무시하는 주장이자 나아가 우리나라 공교육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논리다.
어쩌면 이는 현 정부의 교육정책을 훌륭히 계승하는 정책인지도 모른다. 노무현 정부는 사교육비 경감 대책이랍시고 EBS 방송 강의를 수능에 반영하겠다며 전국의 모든 학교에 EBS 방송 테이프를 공급했고 EBS 인터넷 강의를 실시했다.
학생들은 교과서에, 수능 문제집에, EBS 문제집을 더 사야 했다. 학원에서는 EBS 문제집을 가공한 교재로 강의를 하였고, 학생들은 학원을 다녀온 후 자정이 넘어 EBS 방송 강의에 접속한 후에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현 대학서열화체제를 전제로 한 입시제도 하에서는 그 어떤 대책도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정책이었다.
한나라당 후보가 신자유주의 수구 세력인 이유
이명박, 박근혜 등을 수구 세력이라 부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오늘보다 어제가 좋았다'며 '어제로 돌아가자'는 세력이 바로 수구 세력이다. 지금의 입시 고통도, 사교육 열풍도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교육양극화 현상도 부족하다고 하여 아예 60, 70년대 그 끔찍했던 시절로 돌아가자고 하기에 그들이 바로 수구 세력인 것이다. 다만 그들이 이른바 '자율성', '경쟁력'이라는 기치로 자신의 계급적 속성을 은폐하려 들기에 '신자유주의적 수구세력'이라는 모순 형용을 구사할 수밖에 없지만.
한나라당 후보들의 공통점은 우리 교육이 과열된 입시경쟁체제이며 이로 인해 과도한 사교육비 부담이 생겼다는 현실 진단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가혹한 입시경쟁체제와 사교육비 부담의 근본 원인인 대학서열화체제를 조금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경쟁의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무모한 경쟁'이 문제라는 점을 눈감고 있다. 아니 그들은 '경쟁'이 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한 경쟁'에서 유리해지는 계층이 바로 자기네들 계급 계층이기 때문이다. '국가 경쟁력 제고'는 그럴듯한 수사에 불과하다.
원희룡, 반갑다. 그러나 비겁했다
그런 점에서 원희룡 후보의 '서울대 학부 폐지', '국립대 통합 및 단일 학적 부여' 주장은 매우 반갑다. 그가 이러한 주장을 한 저의야 어떻든 간에 대학서열화체제라는 근본 문제를 유일하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다. 이 정책은 민주노동당이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에 주장한 것이 아닌가? 만약 원희룡 후보가 민주노동당 당원이라면 '이중 당적'으로 선관위에 고발해야 할 문제이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남의 정당 정책을 표절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원희룡 후보는 비겁하다. 다른 정당 정책을 참고하는 것은 좋으나 적어도 출처는 밝혀야 책임 있는 정치인의 도리이다.
원희룡 후보가 비겁한 두 번째 이유는 그의 주장이 바로 '대학평준화'와 다름없다는 것을 떳떳이 밝히지 않은 점이다. 이명박, 박근혜 후보가 '누가 진정한 고교평준화 해체론자인가'에 대한 공방을 주고받을 때 그가 만약 '대학평준화'를 용감하게 주장했다면 나는 그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대학입시와 사교육비, 진보진영은 어떤 해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