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문 위에 걸린 인병선 여사의 목각 시.안병기
껍데기에 둘러싸여 살면서도 껍데기인 줄을 모르고 사는 삶이란 얼마나 가소로운 것인가. 그는 누구보다 먼저 우리네 삶을 덮고 있는 껍데기에 주목했다. 4.19의 껍데기, 동학혁명의 껍데기와 한반도를 덮고 있는 '쇠붙이'에 주목했다. 마침내 시인은 '껍데기는 가라'고 마치 주장자를 든 선사처럼 외쳤다. 그는 시인이기 이전에 시대를 관통할 줄 아는 밝은 눈을 가진 예언자였다.
나는 잠시 쪽마루에 앉아 시인의 삶과 시를 떠올린다. 내가 오늘 떠올리는 그의 시는 '껍데기는 가라'도 아니고 '아니오'도 아니요,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도 아니다. 1967년 <동서춘추> 6월호에 실렸던 '종로5가'라는 시다.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 속에서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
흙 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종묘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가 양지 쪽 기대 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묻은 긴 편지를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후략)
-신동엽 시 '종로5가' 일부
'노동으로 지친' 시 속 화자는 무작정 상경한 것으로 보이는 소년과의 우연한 부딪침을 갖는다. 그리고 그 소년의 모습을 통해 창녀나 공사장 인부로 전락한 1960년대 사람들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들은 소년의 누이이거나 아버지다. 농촌의 해체가 가정의 해체로 이어진 것이다. 흙묻은 고구마를 등에 걸머진 소년. 노동자의 홍수 속으로 금세 사라지는 소년을 통해 시인은 해체된 민족적 삶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가 보여주는 풍경은 지나버린 옛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걸까. 대답부터 먼저 말한다면 '아니올시다'이다.
우리는 지금 세계화의 물결 속에 휩쓸려 가고 있다. '세계화'라는 말을 바꿔서 말한다면 '당신들의 민족적 삶의 원형을 버리라"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버렸는데도 거대자본 내지는 자신의 발아래 거대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국가들은 더 버리라고 끊임없이 요구한다.
세계화의 끝은 내 알맹이를 버리고 남의 껍데기를 둘러쓰는 것이 될 것이다. 강대국과 맺는 FTA들은 민족적 삶의 원형을 완전히 붕괴시킬 것이고 마지막엔 가정의 해체까지 덤으로 안겨줄 것이다.
신동엽 시 '종로5가'가 보여주는 세계는 결코 40년 전의 과거가 아니다. 앞으로 닥쳐올 미래에 대한 예고편이다. 내가 보는 세계화는 '팜므파탈'이다. 그 허울좋은 미명은, 그 매혹적인 여인은 우리의 농촌을 유혹해서 끝내 파멸시키고 말 것이다. 우리는 멀지 않은 장래에 끔찍한 내용으로 가득한 본 영화를 보게 되리라.
오후 4시 반. 시인의 집을 떠날 시간이다. 마지막으로 방문 위에 붙어있는 인병선 여사의 시를 읽어본다. "우리의 만남을/ 헛되이/ 흘려버리고 싶지 않다." 서서히 부여를 떠난다. 지나가는 길가 여기저기에 수박을 파는 봉고가 서 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부여는 수박을 특산품으로 내세우고 있다. 갑자기 고은 시인의 '투망'이란 시의 끝부분이 떠오른다.
한반도여 아무리 가난할지라도 내 오징어를 팔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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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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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시대를 깨우던 그의 쩡쩡한 목소리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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