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성균관. 북한화가 전시회가 열렸던 밀알미술관에서 강신범의 작품을 촬영했습니다.강신범
조선 건국의 주역은 성리학자들이다. 성리학은 공자의 가르침을 이념으로 받아들이는 윤리학이며 정치학이다. 그래서 임금과 신하의 얘기가 많이 등장한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듬살이하는 인간들의 가장 인간적인 학문이다.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가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설파한 학문이다. 신뢰하면 가르침이 되고 행동하면 인격이 완성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기려는 성리학자들에게 불교는 걸림돌이었다. 금강경 장엄정토분에 나오는 응무소주(應無所住)를 신봉하는 불교가 권력의 비호아래 위세를 누리고 과다한 토지를 소유하여 노비와 소작농을 착취하는 불교는 척결의 대상이었다. 무소유에 대한 이율배반이라는 것이다.
불교는 살생을 계율로 금하고 있다. 버러지 한 마리도 죽이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자존을 위하여 스스로 죽을 수 있고 대의를 위해서 타인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이 성리학자들이다. 인생의 한순간은 억겹의 생애에 티끌보다 작은 찰라라고 말하며 부적절한 관계마저도 인연의 범주로 포용하려는 불교는 성리학자들에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집단이었다.
중국 수·당 시대 불교와 도교의 폐해로부터 태동한 성리학이 고려 말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이 땅의 엘리트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정몽주, 이색, 길재 등 원리주의자들은 불교의 폐단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유교의 힘으로 고려를 개혁하려 들었고 정도전, 하륜, 권근 등 근본주의자들은 권력의 힘으로 유교를 확산하려 들었다.
공통분모는 같았으나 방법은 달랐다
중증에 걸려있는 고려를 구하는 수단으로 유교라는 공통분모는 같았으나 방법에는 우선순위가 달랐다. 꺾이되 구부러지지 않겠다는 원리주의자들은 처형되거나 초야에 묻혀 학맥을 이어갔고 근본주의자들은 힘으로 유교를 확산시키고 법전과 정책으로 백성들의 삶의 질을 끌어올려야겠다는 일념으로 새 세상을 개창했다.
유교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 근본주의자들은 무인의 힘을 빌려 혁명에 성공한 다음 군주의 힘을 나누어 가지려다 좌절했다. 초야에 묻혀있던 원리주의자들은 길재, 김종직, 김굉필로 이어지는 학풍을 계승 발전시키며 조광조 시대에 힘을 창출하려다 또 한 번 좌절했으며 퇴계 이황시대에 이기성정론(理氣性情論)으로 꽃을 피웠다.
"근래 법령이 해이해져 부녀자가 절에 올라가는 것이 길에 끊이지 않으니 공공연히 음행(淫行)을 저지르고 절개를 잃는 것이 이러한 까닭에서 비롯되는데 이것은 시정의 아름다운 풍속을 해치는 것입니다. 부모를 추모하는 법회(法會)를 막론하고 부녀자들이 절에 올라가는 것을 일절 모두 금단하여 풍속을 바루도록 하소서."-<태종실록>
자비(慈悲)를 사상으로 하는 불교가 이상한 자비를 베풀었고 그것은 '인륜을 파괴하는 인연(緣起) 이다'라는 얘기다. 태종 이방원은 사간원의 상언을 윤허하고 엄격히 시행하라 명했다. 호조(戶曹)에서 첫 깃발을 들었다. 승려들의 경행(經行) 금지가 바로 그것이다. 경행이란 수백 명의 승려들이 부처를 모시고 길거리를 몰려 돌아다니며 북을 치고 불경을 외우는 것을 말한다.
이 때 주위의 눈을 피하여 태상전에 드나들던 승려 각미(覺眉)가 요망한 말을 퍼트린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장 1백대 형과 수군(水軍)에 입영하라는 벌을 받은 각미는 곤장을 맞고 경상도 동래 수군기지로 가다 길에서 죽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포문을 열었다. 불교의 퇴폐상을 열거하고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자는 것이다. 불교와의 종교전쟁을 선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