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에게 남아있는 일이란 그저 열심히 밥 먹고 살아갈 궁리를 하는 것일 뿐. 청춘의 그리움은 항상 남는 법이지만 지금의 현실을 생각하면 왜 이렇게 살아왔나하는 바보스런 후회밖에 남는 게 없다.
물려받은 재산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조금 이라도 여유를 가지고 살겠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그러한 희망은 찾을 수가 없고. 그저 열심히 일하여 아이들 가르치고 부모님한테 용돈을 주는 착한 아들의 이미지로만 남게 될 뿐이고 그저 보통의 40대와 다르지 않는 그런 인생살이 일뿐이다.
그런 내게도 청춘이 있었던가 하는 물음은 추억이었고 잠깐 짝사랑했던 어느 여학생과의 시작이었다. 청춘, 그 시절은 너무나 짧았지만 너무나 순수했기에 오늘날 이해타산이 앞서는 사랑과는 비교가 안 된다.
막 20살이 되려고 하는 청춘에 고향을 떠나 새로운 세계로 접어들기 시작해 마주한 게 기차였다. 물론 중학교 때에도 기차를 이용하긴 했지만 그때는 그저 교통수단의 한 방편이었을 뿐이고 기차에게서 느끼는 고향의 정이나 애틋함은 없었다.
처음 취업 준비를 할 때 자주 이용했던 게 기차였다. 물론 그 보다 더 빠른 버스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기차가 주는 주변의 풍경이나 진한 사람의 냄새를 맡을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참 별다른 놈이라고 했지만 그때 느꼈던 사람 사이의 풍경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내가 좀 별다른 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광주에서 여수까지 가는 비둘기호 완행열차가 여수에 다다르기 전에 내가 내려야 할 벌교역이 있었다. 버스로는 1시간 반 기차로는 3시간 그 사이사이 열 몇개의 정거장 아니 몇 개를 빼고선 그냥 간이역이라 해야 맞을 것 같은 조그만 역들이 많이 있었다.
담도 없고 나무 울타리 몇 개로 로 벽을 대신한 그런 조그만 간이역들. 그때는 광주로 통학하는 학생들도 많았고 촌에서 채소며 푸성귀를 남광주 시장으로 장사를 가는 촌 아줌마들도 많았다. 바닥에는 항상 광주리며 보따리가 널려 있었지만 누구하나 불평한 사람은 없었다.
불편한 대로 인심이 넘쳐나는 그런 낭만이 그때는 있었다. 신록이 한창인 여름이나 눈 쌓인 골 너머에 반쯤 걸쳐있는 반달, 그곳에 한 채만 달랑 남아있는 초가집 그 초가집에서 새 나오는 백열 전등빛이 지금은 하나의 풍경이 되어 내 머릿속에 각인이 돼 버렸다.
토·일 비둘기호는 광주에서 자취를 하는 학생들로 항상 만원이 되 버렸다. 나도 토요일이면 직장에서 조퇴를 하고 광주역을 향했고 어김없이 3시30분 기차를 탔다. 그때만 해도 내 정서는 아직 고향의 집이었고 광주는 여전히 낯선 곳이었다.
지긋지긋한 일주일을 애타게 보내고 마침내 집에 가는 기차를 타면 불편함 보다는 그 안락함이랄까 정신까지 풍요로워졌었다. 기차는 각 학교들의 교복 전시실 같았고 까까머리 남학생과 양 갈래로 따 내린 단정한 여학생들 그중에 유독 눈에 띠는 한 학생이 있었다.
중학교 때 짝사랑했던 옆집 누나를 닮은 그 여학생. 자줏빛 교복에 하얀 칼라가 돋보였던 그 여학생. 물론 나는 사회인 이었지만 나이는 그 학생과 같았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고등공민학교만 마치고 검정고시로 학업을 이었고 사회 진출도 남보다 더 빠르게 했을 뿐이었다.
그 후로 토요일만 되면 그 시간이 기다려졌었고, 오늘은 눈인사라도 한번 해야지 하는 야심찬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지만 기회는 쉬이 다가오지 않았다. 설령 그런 기회가 온다 해도 말도 못 붙을 나였을 테고 그저 멀리서 바라만 봐야 하는 용기 없는 그런 놈이었다.
기차는 느릿하지만 남광주, 효천을 지나 본격적인 시골길을 달리기 시작했고 어디서 내렸는지 눈여겨 볼 새도 없이 사람들 틈에 섞여 어느 틈엔가 기차에서 보이질 않았고 그녀가 보이지 않는 객실에는 더 이상의 기다림도 설렘도 없었다.
누구인지 어느 학교엘 다니는지 알 길도 없었다. 또 다시 지루한 일주일을 보냈다. 오늘 만큼은 어디서 내리는지 어느 학교엘 다니는지 꼭 알아내고야 말리라 하는 비장한 각오로 기차를 탔다.
이 칸, 저 칸으로 그녀를 찾기 시작했고 이윽고 그녀가 있는 칸으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그러나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뿐 여전히 말붙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래 오늘은 그녀가 내리는 역만 알리라’하는 생각이 그저 속절없는 위안만 줄 뿐이었다.
이윽고 그녀가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리는 역이 가까웠으리라 그녀는 사람들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어디서 내리는지 나는 알아내고야 말았다. 지금도 그 역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녀가 내리는 역은 석정리라는 조그만 간이역이었다.
조그만 역사 주변엔 담도 없었다. 역사 옆으론 큰 나무가 한그루 있었고 울타리 몇 개로 담을 대신한, 역이라고 불리기도 못한 너무나 조그마한 역이었다. 그 역사 안으로 사라져간 그 여학생 때문에 27년이 지난 지금도 난 그 역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끝내 말 한 번 붙이지 못했지만 그때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청춘의 시작이었음을 나는 사랑한다. 지금은 어디에서 고향을 잊고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내 마음의 풍금은 여전히 고향. 그리고 그녀가 내렸던 그 역을 연주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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