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만에 명찰을 달아보니 새로운 마음이 싹틉니다.박병춘
"어? 샘도 명찰 달았다!"
"샘~ 멋져요~! 왠지 어색하기도 하고요! 하하하!"
고등학교 선생 19년째입니다. 20년 전 교생실습 때를 빼면 학생들 앞에서 명찰을 다는 게 공식적으론 처음 있는 일이네요. 복도나 교정에서 부닥치는 학생들이 신기한 눈으로 제 명찰을 봅니다. 물론 일부 동료 교사들도 의아한 눈으로 바라봅니다.
제자에게 명찰 빌린 까닭
저는 한 인문계 고등학교 1학년 담임입니다.
제가 근무하는 학교는 올해부터 교복에 명찰을 꿰매 붙박이용으로 다는 게 아니라 옷핀으로 떼고 달 수 있게 아크릴 명찰을 만들었지요. 그래서 얼마 전 하복에 착용할 명찰을 개인별로 두 개씩 공동구매를 했답니다.
희한하게도 저희 반에 저와 이름이 비슷한 '박병준'이란 학생이 있는데, 이 학생의 별명이 제 이름인 '박병춘'이랍니다. 그래서 이 친구 동복 명찰엔 획 하나가 그어 있어서 담임 이름처럼 불리고 있지요.
아무튼 하복에 착용할 명찰이 도착한 날, 저는 '박병준' 군의 명찰에 획 하나를 더해 '박병춘'을 만들어서 제 옷에 달고 다닙니다. 잠시 빌린 셈인데, 곧 제대로 된 명찰을 하나 장만할 생각입니다.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많으니까요.
"박병춘 선생님이 어떤 분이세요?"
교무실에 심부름을 온 듯한 학생 한 명이 저를 찾습니다.
"응, 난데 왜 그래?"
"어떤 선생님께서 이 서류 주시던데요?"
이 대화를 놓고 저는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아무리 제가 직접 가르치는 학생이 아니라 해도 제 이름과 얼굴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12개 학급 가운데 4개 학급만 수업에 임한다 해도 지난 3월, 1학년 전체 수련회 때 교사별 소개가 있었고, 3개월 이상 같은 학교에서 생활했으므로 제 신상 정도는 알고 있으려니 판단했습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심부름을 보낸 교사의 이름마저 학생이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그 학생은 송신자와 수신자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심부름을 했던 것이지요.
명찰 달고보니, 교생으로 돌아간 새 마음
그래서 명찰을 달게 되었는데 막상 달고 나니 의외의 성과가 눈에 띕니다.
묘한 일입니다. 명찰을 달고부터 생활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명찰을 달고 교실에 들어서던 첫째 날, 학생들이 명찰을 단 선생을 보고 무척이나 신기해하고 술렁거렸습니다. 그러면서 '왜 명찰을 달았느냐'고 물어서 그냥 쉽게 대답했습니다.
"교생 실습하는 기분으로 새롭게 출발하려고 그래~!"
"캬캬캬, 엊그제 교감 선생님이 오늘은 교생이 되셨네요!"
넉살 좋은 녀석들이 너스레를 떱니다. 얼마 전에 반백발을 까맣게 염색한 데다 명찰까지 달았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뭐야, 이 넘아! 내가 그렇게 나이가 들어보였단 말여?"
"헤헤헤, 아무튼 선생님! 신선하네요~!"
신기합니다. 명찰 달기 열흘째, 아침에 출근하여 명찰을 달 때마다 경건해집니다. 이름 석자를 걸고 학생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까 새롭게 다짐하며 짧은 시간이지만 엄숙해집니다.
5년 전 일입니다. 두 명의 제자가 학교에 찾아온 일이 있습니다. 두 명은 선후배 사이였는데 함께 작곡하는 일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저와 그 중 한 명은 평소에도 교류가 있어 잘 알고 있었지만 다른 한 명은 졸업하고 나서 몇 년이 흘러 아주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그 제자가 대뜸 묻는 말이 '선생님, 혹시 제가 누군지 아시나요?'였습니다. 순간 당황한 저는 오감을 총동원해 기억을 되살렸습니다. 그리곤 운이 좋게도(?) 정확하게 이름을 알아맞혔습니다.
이후 스승의 날을 맞아 아주 근사한 화분 하나를 배달 받았는데, 그 화분 안에 쪽지가 한 통 들어 있었습니다. 그 요지는 '학창시절에 이름을 기억해준 선생님을 딱 한 분 만났습니다, 감사합니다'였습니다.
이름을 기억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스승이 되어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