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 국가가 보상해야"

[인터뷰] KLO 부대 첩보대장 이연길씨

등록 2007.06.07 17:51수정 2007.06.08 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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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끝난 지 50여년. 아직도 우리사회는 전쟁의 상처를 말끔히 씻어내지 못하고 있다. 서울, 평양 또는 금강산에서 잠시나마 그리운 혈육과 상봉한 사람들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다. 아직도 이 땅에는 가족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노년을 보내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계급도 군번도 없이 싸우다 이름 모를 골짜기에서 죽어간 이들의 넋이 편히 쉴 곳도 여의치 않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이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이들이라면, 마땅히 국가의 이름으로 그들의 삶에 진실하게 답해야 할 것이다.

이연길씨(81)는 풍운아처럼 살아왔다.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1945년 열아홉살의 나이에 38선을 넘었다. 광복 직후 서울에서 북쪽 출신으로 살아간다는 게 만만한 일은 아니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일도 있었다. 이념갈등 앞에서 모든 것이 무기력했던 시절, 그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남쪽으로 향했다고 고백한다. 그날의 선택은 이씨의 인생을 줄곧 지배해 왔다.

학구열이 강했던 이씨는 1948년 성균관대학교 정경학부에 입학했는데, 이 무렵 국방부 제4국이 주도한 특별교육과정을 4개월간 수강하면서 새로운 길을 걷게 된다. 그곳에서 배운 통계, 측량, 병기, 기상, 심리 등은 이른바 특수첩보임무 수행을 위한 기초교육으로, 이씨는 전쟁이 터지자 곧바로 미군 공보원을 거쳐 KLO부대(Korea Liasion Office․미극동군사령부 산하 주한첩보연락처)에서 활약하게 된다.

이씨는 KLO 산하 유일한 해상기지였던 고트 부대를 지휘했다. 대동강 하류에서 황해 바다로 빠져나오는 길목에 위치한 초도가 그의 아지트였다. 이씨는 이곳에서 특수부대 요원들을 훈련시키고 북한 땅을 드나들며 각종 정보를 수집했다. 압록강과 중국바다까지 들어가 배를 나포한 것이나 평양과 모스크바의 도청 공작을 진행한 것으로 미뤄 그가 첩보부대에서 차지했던 비중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시련도 적지 않았다. 작전 도중 적지 않은 대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여기에는 이씨의 친형도 포함돼 있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연합군사령부는 켈로부대의 해산을 명했다. 이씨는 생사를 함께 한 부대원들과 헤어진 뒤 공군 특수부대에서 2년쯤 더 일하다가 군복을 벗었다. 그리고 젊은 날의 기억을 잊고 사업가로 살아왔다. 비록 군인은 아니었지만 그는 여전히 현역 못지않은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북한의 고위 관계자들과 수시로 접촉하며 망명을 추진한 일이나 북한 민주화협의회 회장을 지낸 약력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한평생 첩보영화의 주인공처럼 살아왔다.

이씨가 다시 켈로부대에 관심을 가진 건 10여년 전이다. 우연히 소식을 듣고 찾아간 부대원들의 고단한 삶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이씨는 동료들의 지난 세월의 무심함을 후회하며 틈나는 대로 전장의 부대장처럼 퇴역한 노병들을 챙겼다. 자신의 명령에 따라 사지로 뛰어든 사람들에게 더 늦기 전에 작은 힘이라도 주고 싶었다고 한다.

"인천 소래포구 오두막에 살던 부대원이 있었는데 전쟁 끝나고 배를 타다가 로프에 걸려 다리 하나가 잘렸어요. 남편이 일을 못하니까 부인이 대신 조개를 주우러 다녔는데, 밀물이 들어오는 걸 모르고 일하다가 죽었습니다. 주검을 건져보니 무거운 조개 주머니가 허리에 꽉 매달려 있더라구요. 그걸 빨리 풀었으면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버리기 아까우니까 짊어지고 나오다가 힘이 빠진 거예요. 그날 밤 함께 술 마시고 옛날 얘기하면서 울었는데…. 얼마 후 그 친구도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더군요."


이씨는 도움을 청할 만한 기관을 모두 접촉했다. 그때마다 "소관사항이 아니므로 관계부처에 이첩한다"는 공문이 날아왔다. 관계부처인 국방부도 "외국군 부대 소속이라 보상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국가기관을 통한 문제해결이 어렵겠구나.' 하고 자포자기할 무렵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조사가 늦어 송구스럽다"는 답신이 왔다. 국가기관이 조사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에 우선 힘이 생겼고, 민원인에게 예의를 갖추는 공무원을 보고 무척 흐뭇했다고 한다.

이른바 '북파공작원'들의 존재는 오랜 세월 금기의 영역이었다. 국가인권위가 2003년 3월 '북파공작원 관련 특별법 제정'을 권고하고 이듬해 1월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뒤에서야 북파공작원들은 비로서 음지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특수요원과 유족에 대해 실질적인 보상을 하도록 한 법률의 입법취지와 달리, 외국군 소속 특수임무수행자들은 보상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 때문에 켈로 부대원들은 한국군과 다를 바 없는 특수임무를 수행하고도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몇몇 특수부대원이 제기한 보상청원에 대한 미 공군성의 답변이다. 2006년 1월 미 공군성은 "본질적으로 한국전쟁기간 중 동맹을 맺은 군사일 뿐 미군에 의해 민간인으로 고용되거나 계약을 바탕으로 하여 미군에 복무한 자로 볼 수 없으므로, 미국은 적극적 보상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씨는 자신이 이끌었던 해상고트대의 경우 미군에서 파견한 고문관이 상주했으며, 수집한 정보는 미군에 직접 보고했다고 주장한다. 즉, 사실상 미군의 일원으로 복무했다는 얘기다.

미군의 보상책임은 논외로 치더라도 한국 정부가 이들을 외면하는 것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국가인권위가 국회의장과 국방부장관에게 "비록 외국군 소속이라도 한국인 북파공작원에게 보상할 의무가 있다"며 관련 법률의 제ㆍ개정을 권고한 것도 그런 이유다.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혹독한 훈련을 이겨내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에 대한 처우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한국군 소속 여부'는 어쩌면 형식 논리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켈로 부대원들이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기까지는 앞으로도 여러 절차가 남아 있다. 이씨는 후일 보상금을 받게 되면 먼저 간 부대원들을 기리는 위령탑을 세우고 싶다고 말한다. 힘닿는 데까지 노력해서 꼭 결실을 보고 싶다고 말하는 이씨.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는 건강이 걱정스럽다. 수전증으로 고생하는 중에 얼마 전엔 폐암 진단까지 받았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아있을 때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할 텐데…'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 노병의 마지막 바람이다.

덧붙이는 글 | 이 원고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인권>잡지 5,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글쓴이 육성철 님은 국가인권위원회 홍보협력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원고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인권>잡지 5,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글쓴이 육성철 님은 국가인권위원회 홍보협력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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