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파라솔 아래 눕다

[싱가포르 문화기행 31] 빈탄(Bintan) 가는 길

등록 2007.06.07 09:40수정 2007.06.07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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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서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치고 싱가포르 타나 메라(Tanah Merah) 페리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의 페리선사에 빈탄(Bintan) 행 페리 예약서를 제시했다. 페리 티켓을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서 조금 걱정이 되었는데, 기우였다. 페리선사에서는 우리 가족의 인도네시아 입국 카드까지 인쇄하여 건네준다. 빈탄(Bintan)은 싱가포르에서 배로 1시간 거리에 있는 휴양지로서 싱가포르가 개발하고 싱가포르에서 출발하는 여행자들이 즐기는 곳이지만, 인도네시아 땅이다.

싱가포르-빈탄 페리. 싱가포르에서 빈탄까지 약 1시간 만에 주파한다.
싱가포르-빈탄 페리. 싱가포르에서 빈탄까지 약 1시간 만에 주파한다.노 시경
고속 페리는 생각보다 훨씬 부드럽게 부두 접안 시설을 떠나기 시작했다. 열대의 짙푸른 바다가 페리 창밖의 바로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열대의 태양은 구름 속에 숨었다가 다시 얼굴을 내밀기를 반복한다. 가끔 소나기의 강한 빗줄기가 쾌속선 천정을 강하게 때리고 지나간다. 날씨는 맑은 날도 되었다가 흐린 날도 되었다가 비까지 내린다. 나는 열대의 더위 속을 시원하게 타격하는 소나기가 너무 시원했다.


페리 선 내부 정면의 TV에서는 빈탄의 여행 사이트들을 화려한 색상으로 광고하는 화면이 빈탄행 여행자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창가에 앉은 딸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페리의 창 밖으로 펼쳐지는 적도의 바다와 대형 선박들을 감상하고 있다. 항상 안락한 여행을 추구하는 아내는 지금 내 옆에서 여름날의 여유로운 시간을 만끽하고 있다.

나는 바다와 딸, 아내를 바라보면서 잠시 과거를 돌아보았다. 나는 십여년 전에 싱가포르에서 빈탄 옆의 바탐(Batam) 섬을 향하는 바다 위에 떠 있었다. 그때 내 옆에는 배낭 하나가 달랑 있었고, 인도네시아에 입국하는 여행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때 나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들어가는 항공권을 구입하기 위하여 바탐 섬을 향하고 있었다. 그 기억이 머리 속에 또렷한데, 시간은 십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가 있었다.

가끔 싱가포르 항에 입출항하는 거대한 컨테이너선과 유조선이 시야의 전면을 압박해 들어올 정도로 다가왔다가 멀어진다. 작은 섬나라인 싱가포르 항 주변에 참으로 많은 화물선이 떠 있었다. 싱가포르가 지닌 지정학적 위치가 워낙 훌륭하기도 하지만, 미래를 바라볼 줄 아는 근면한 지도자를 만난 덕분일 것이다.

페리는 약 55분간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빈탄섬 사이의 바다 위를 달렸다. 우리 가족은 뜨거운 태양이 내려 쪼이는 빈탄의 벤다르 벤탄 텔라니(Bendar Bentan Telani) 페리 터미널에 내렸다. 터미널 입구의 인도네시아 비자 판매대에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10US$에 인도네시아 비자를 사고 입국심사를 받았다.

입구심사대를 보면 인도네시아가 얼마나 인력이 남는 국가인지를 보여준다. 한 사람의 입국심사와 여권을 검토하는데 3명의 직원이 앉아서, 한 사람은 여권을 심사하고, 나머지 두 사람은 인도네시아 비자를 여권에 붙여주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불과 1시간 거리이지만 이 직원들 태도에서부터 인도네시아 특유의 나른하고 서두르지 않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빈탄 페리터미널에서 우리가 묵을 앙사나(Angsana) 리조트까지 가는 길은 전혀 개발되지 않은 열대 섬의 모습 그 자체이다. 키 작은 관목들이 뜨거운 태양을 받치고 있었다. 지나는 길에 보이는 골프장. 이 더위에 골프를 치면 고통스럽지 않을까 싶다.

리조트 프론트 데스크의 여종업원들은 화사한 전통복장에 손님을 향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욕야카르타(Yogjakarta) 출신이라는 여종업원은 바다가 보이는 방을 달라는 내 요청에 방금 바다가 보이는 방이 비었다며 나에게 또 웃음을 보낸다. 리조트 건물 곳곳에 열대의 태양이 스며들고 있었지만, 바다가 눈앞에 있기에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리조트 4층의 숙소에 짐을 풀었다. 방에서 보면 적도의 바다가 바로 닿을 듯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서울에서 수영을 배운 딸 녀석은 널따란 해변과 시원한 물이 찰랑거리는 수영장을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식사도 하지 않고 바다로 뛰어나가려고 한다.

앙사나 해변. 적도의 바다가 펼쳐진다.
앙사나 해변. 적도의 바다가 펼쳐진다.노 시경
우리는 주저할 것 없이 해변으로 내려왔다. 해변에는 여행자들이 많지 않고 드문드문할 정도로 한적하다. 회사 사무실에서 얼마나 그려오던 열대의 야자수 아래 바닷가이던가! 나는 모래사장에서 전속력으로 질주하여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적도의 바다 속, 따스한 바닷물이 온몸의 감각기관을 통해 스며드는 것 같다. 모래사장 쪽으로 몸을 옮기면, 부드러운 감촉의 바닷물이 발목에서 찰랑거린다.

내가 해변의 모래사장에 몸을 누이자 아내와 딸이 내 몸 위에 모래를 쌓아주었다. 잠시 눈을 감아 보았다. 꽤 긴 시간 동안 비행기로 하늘을 날고 배로 바다를 건너 만끽하는 여유이다. 나는 따뜻한 모래 속에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즐기고자 했다.

모래 속에서의 명상의 시간을 오랫동안 즐길 수는 없었다. 딸아이가 바다 위에 산산이 널린 조개껍질을 발견하고 아빠를 부르는 것이다. 어느새 내 옆에 온 딸아이는 조개를 같이 모으러 다니자고 보채고 있었다.

바닷가에는 놀랍게도 불가사리 모양으로 구멍이 뚫린 '샌드 달러(Sand Dollar)'라는 조개껍질들이 이곳저곳에 널려 있었다. 껍질의 불가사리 문양은 불가사리인척 하여 다른 물고기들의 공격을 피해보려는 조개들의 고육책이다. 그러나 이 예쁜 조개의 문양은 딸아이의 조개 수집의 표적이 되고 있었다. 딸아이의 손에는 벌써 이 샌드 달러가 가득 찼고, 계속 발견되는 샌드 달러는 이제 내 손에 쌓여가고 있었다.

딸아이와 한가하게 해변 산책을 하고 있으려니, 사람을 피해 황급히 도망가는 작은 생명체들이 보인다. 발가락보다 조금 큰 투명 물고기가 다리 사이로 쏜살같이 지나가고, 껍질이 초록색인 게 한 마리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도망을 친다.

딸아이를 불러 이 작은 초록색 게를 보여주려고 하였으나, 게는 이미 모래 속에 구멍을 파고 숨어버렸다. 게가 파 놓은 꽤 큰 구멍을 힘차게 파 보았지만, 게는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바다 모래사장 위에는 게들이 뚫어 놓은 구멍과 함께 게들이 구멍을 파면서 쌓아 놓은 모래 더미들이 뭉쳐있다.

산호 암석. 산호의 잔해가 해변에 쓸려 왔다.
산호 암석. 산호의 잔해가 해변에 쓸려 왔다.노 시경
모래사장을 걷다보면 군데군데에 조그마한 산호초 암석들이 박혀 있다. 이 돌 아닌 돌 표면의 물결 문양은 바로 이 돌이 산호의 잔해임을 말해준다. 이 산호가 닳아져 만들어진 빈탄 해변의 백색 모래는 색도 고울 뿐 아니라 부드럽기 그지없다.

나는 해변을 걸으면서도 한낮의 적도를 비추는 태양을 조심하고 있었다. 어릴 적, 여름의 남해안 바닷가를 아무 생각 없이 산책하다가 얼굴과 등에 화상을 입고 저녁마다 쓰라렸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숙소에서 자외선 차단제를 온 몸에 발랐고 옷으로 등을 가렸지만, 한낮의 열대지방 태양은 예상보다 훨씬 뜨거운 것이었다. 잠시 해변 산책 도중 태양에 노출되었던 어깨가 열이 나고 계속 후끈거렸다. 나는 수영장 파라솔 아래에서 오후 내내 선탠을 하고 있는 영국 아가씨가 이 뜨거운 태양을 어떻게 견뎌내고 있는지 참으로 신기했다.

해변의 파라솔. 바다를 바라보며 쉬는 시간이 한가롭다.
해변의 파라솔. 바다를 바라보며 쉬는 시간이 한가롭다.노 시경
나는 태양을 피해 해변의 파라솔 밑에 누웠다. 싱가포르 쪽 해변을 바라보았다. 누워서 보니, 내 발가락 사이로 멀리 아늑한 열대 해변의 정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내 눈에는 바닷물과 모래사장이 가득하고, 귀에는 한낮의 해변을 때리는 파도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짙푸른 하늘에는 새털구름만이 한가롭게 흘러간다. 이 세상 근심은 내 것이 아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2006년 8월의 여행 기록입니다.이 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여행기는 2006년 8월의 여행 기록입니다.이 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싱가포르 #빈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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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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