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빈탄 페리. 싱가포르에서 빈탄까지 약 1시간 만에 주파한다.노 시경
고속 페리는 생각보다 훨씬 부드럽게 부두 접안 시설을 떠나기 시작했다. 열대의 짙푸른 바다가 페리 창밖의 바로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열대의 태양은 구름 속에 숨었다가 다시 얼굴을 내밀기를 반복한다. 가끔 소나기의 강한 빗줄기가 쾌속선 천정을 강하게 때리고 지나간다. 날씨는 맑은 날도 되었다가 흐린 날도 되었다가 비까지 내린다. 나는 열대의 더위 속을 시원하게 타격하는 소나기가 너무 시원했다.
페리 선 내부 정면의 TV에서는 빈탄의 여행 사이트들을 화려한 색상으로 광고하는 화면이 빈탄행 여행자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창가에 앉은 딸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페리의 창 밖으로 펼쳐지는 적도의 바다와 대형 선박들을 감상하고 있다. 항상 안락한 여행을 추구하는 아내는 지금 내 옆에서 여름날의 여유로운 시간을 만끽하고 있다.
나는 바다와 딸, 아내를 바라보면서 잠시 과거를 돌아보았다. 나는 십여년 전에 싱가포르에서 빈탄 옆의 바탐(Batam) 섬을 향하는 바다 위에 떠 있었다. 그때 내 옆에는 배낭 하나가 달랑 있었고, 인도네시아에 입국하는 여행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때 나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들어가는 항공권을 구입하기 위하여 바탐 섬을 향하고 있었다. 그 기억이 머리 속에 또렷한데, 시간은 십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가 있었다.
가끔 싱가포르 항에 입출항하는 거대한 컨테이너선과 유조선이 시야의 전면을 압박해 들어올 정도로 다가왔다가 멀어진다. 작은 섬나라인 싱가포르 항 주변에 참으로 많은 화물선이 떠 있었다. 싱가포르가 지닌 지정학적 위치가 워낙 훌륭하기도 하지만, 미래를 바라볼 줄 아는 근면한 지도자를 만난 덕분일 것이다.
페리는 약 55분간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빈탄섬 사이의 바다 위를 달렸다. 우리 가족은 뜨거운 태양이 내려 쪼이는 빈탄의 벤다르 벤탄 텔라니(Bendar Bentan Telani) 페리 터미널에 내렸다. 터미널 입구의 인도네시아 비자 판매대에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10US$에 인도네시아 비자를 사고 입국심사를 받았다.
입구심사대를 보면 인도네시아가 얼마나 인력이 남는 국가인지를 보여준다. 한 사람의 입국심사와 여권을 검토하는데 3명의 직원이 앉아서, 한 사람은 여권을 심사하고, 나머지 두 사람은 인도네시아 비자를 여권에 붙여주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불과 1시간 거리이지만 이 직원들 태도에서부터 인도네시아 특유의 나른하고 서두르지 않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빈탄 페리터미널에서 우리가 묵을 앙사나(Angsana) 리조트까지 가는 길은 전혀 개발되지 않은 열대 섬의 모습 그 자체이다. 키 작은 관목들이 뜨거운 태양을 받치고 있었다. 지나는 길에 보이는 골프장. 이 더위에 골프를 치면 고통스럽지 않을까 싶다.
리조트 프론트 데스크의 여종업원들은 화사한 전통복장에 손님을 향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욕야카르타(Yogjakarta) 출신이라는 여종업원은 바다가 보이는 방을 달라는 내 요청에 방금 바다가 보이는 방이 비었다며 나에게 또 웃음을 보낸다. 리조트 건물 곳곳에 열대의 태양이 스며들고 있었지만, 바다가 눈앞에 있기에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리조트 4층의 숙소에 짐을 풀었다. 방에서 보면 적도의 바다가 바로 닿을 듯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서울에서 수영을 배운 딸 녀석은 널따란 해변과 시원한 물이 찰랑거리는 수영장을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식사도 하지 않고 바다로 뛰어나가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