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집에서 죽고 싶다

[아내와 걸었다, 바바! ⑦] 집

등록 2007.06.06 22:30수정 2007.06.11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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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김종휘는 그냥 어느 날, 아내와 길을 나서 걷기 시작했다. 65일 동안 동해→남해→서해의 바닷가를 걷고 타고 또 걸었다. 해안선 걷기 여행의 눈요깃감이고, 보이는 대로 잠깐 생각해볼 세상 흔적이며, 해안선 따라 걷고 서고 먹고 쉬고 자고 일어난 이야기를 여덟 편으로 나눠 연재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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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항시 단촐한 짐이었다 ⓒ 김종휘

집. 이 단어를 써놓고 한참 바라보다가 발음하는 순간 말놀이만 하고 말았다. 집. 물집. 살집. 몸집. 계집. 칼집. 시집. 도무지 집에 집중할 수 없거나 집에 집착할 줄 모르는 타고난 병이라도 있는 것처럼 집! 하고 혼잣말을 하고 난 뒤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집은 그저 눕는 잠자리고 눈비를 가리는 지붕이며 바람을 막는 벽이었다.

몸담았던 그 모든 집에서 나는 즐겁거나 괴로웠고 기쁘거나 슬펐다. 그곳에 추억과 상처가 있었고 만남과 이별이 있었다. 하나 정착하고 뿌리를 내린다는 의미의 집이 나에겐 있지 않았다. 집이란 나만의 방을 만들고, 혹자는 집을 자신만의 우주라고도 했으나 그런 것은 더욱 아니고, 비밀을 쌓아두거나 내밀한 꿈을 꾸는 곳이 아니었다.

칼릴 지브란이 '그대의 집은 꿈꾸지 않는가?' 물었을 때, 그 집은 문을 닫고 지켜야 하는 폐쇄된 안락이 아니라 영적 깨달음을 얻는 열린 순례의 세계를 뜻했다. 나는 그런 의미의 집을 추구했던 것도 아니었다. 집은 그저 서로 다른 장소고 크기고 부피고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부대끼는 사람들에 얽힌 풍문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집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임시 거처였다. 중간에 잠깐 내려서 쉬고 있는 정거장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천막집 유르트(yurt)나 몽골 사람의 이동집 게르(ger)처럼 떠도는 삶을 운명으로 체화한 것도 아니었다. 가능하면 안전하고 편리한 집에 오래 머물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아 옮기고 또 옮겼을 뿐이었다.

집은, 내가 기억하는 모든 집은, 여기 있다가 저기 있고 지금은 이곳에 있으나 곧 딴 데로 가게 될, 그럼에도 늘 똑같은 짐을 부리는 조금씩 다른 세트장이었다. 살았던 집들에서 나는 장식물이란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쓸모없거나 한번 쓰면 불필요해지는 것, 쉬이 망가지거나 손을 많이 타는 것은 있지 않았다. 집은 항시 단출한 짐이었다.

이번엔 어디로 가?

두 살씩 터울 지는 두 누나와 형은 집에서 태어났다. 그 후 어머니는 십년 가까이 임신을 하지 않다가 마흔 넘겨 아이를 뱄다. 남세스러웠던지 걱정 때문인지 더운 여름날 병원에 가서 막내를 낳았다. 병원은 나의 출생 기록을 보관하고 있겠으나, 사망 기록도 보관하게 될지 모르나, 그곳은 집이 아니다. 나는 집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집 하면 사람들은 가족부터 떠올리는데, 나는 그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기억나는 유년기부터 어머니와 사별한 마지막 날들까지 집에는 늘 가족 아닌 식구들이 살았다. 나에게 집이란 가족보다는 그들과 같이 먹고 놀고 자는 합숙소 같은 곳이었다. 집은 그들과 함께 손수레에 짐을 싣고 이사를 다녔던 이 집 저 집 그 집 기타 등등이었다.

나는 현재까지 내 생애의 절반을 어머니의 하숙집에서 살았다. 그 하숙집은 9번 이사했다. 커튼으로 나눈 지하 쪽방, 판자로 지은 가건물, 개량 한옥, 일본식 집, 일반 양옥 등으로 2년에 한 번꼴로 이사했다. 어머니는 말년에 작은 집을 사서 8년을 살았다. 그 집 말고는 다 전세였다. 병에 걸리자 어머니는 집을 팔고 전세로 옮겼고 그곳에서 숨졌다.

자주 이사했어도 어머니는 섬기던 교회 때문에 같은 동네를 맴돌았다. 전세금 올린다는 통보를 받으면 어머니는 바로 집 보러 다녔다. 무조건 큰 집만 골라 전세를 구한 어머니는 이사 전날까지 새로 얻은 집에 가서 큰 방을 여러 개의 작은 방으로 나누는 칸막이 공사를 했다. 어머니는 못질은 시키지 않았지만 도배는 거들게 했다.

많을 땐 동시에 스무 명이 넘는 하숙생이 살았다. 때문에 이사 전후해 도배 일감은 많았고 겨울에는 방방마다 때맞춰 갈아야 할 연탄도 많았다. 새로 도배한 방들, 막 연탄 갈아준 방들, 그 방들 중에 내 방은 따로 없었지만 어느 방이든 들어가 하숙생들 사이에 껴서 자면 그만이었다. 나는 집에서도 방방으로 옮겨다니며 살았다.

그 집을 '우리 집'이라고 부르거나 '나의 집'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큰 하숙집이었다. 주인이 따로 있는 남의 집이라 한 시절 살다가 떠나야 할 집이었다. 이번엔 어디로 가? 하고 물어보면 그뿐인 집이었다. 눌러 살 일 없었기 때문인지 살림 세간은 하숙생들이 저마다 양손에 한 짐씩 들고 옮기면 끝날만큼 간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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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 이웃한 오래된 집은 다 멋있었다. ⓒ 김종휘

여행 중에는 몰랐었다. 끝마치고 사진을 정리하다가 알았다. 그렇게나 많은 집을 찍었다니. 바닷가를 걷는 동안 정말 기분 좋은 집을 실컷 보았다. 한번쯤 살아보고 싶은 집을 너무 흔하게 만났다. 그 집들은 하나같이 키가 낮았고 담장이 없었으며 허름했다. 주변 풍경과 분리되지 않았고 풍광 따라 고즈넉하게 늙어가고 있었다.

곳곳에 빈집이나 폐가도 적지 않아서 조금만 수리하면 바로 들어가서 살 수 있을 것 같은 충동을 자주 느꼈다. 그처럼 검박하고 쓸모 있는 집들을 놔두고 우리는 다 어디에 꽁꽁 틀어박혀 살았던 걸까 싶게 넉넉하게 숨 쉬며 살만한 집은 바닷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런 집을 만나면 가던 발길 옮기지 못하고 괜히 주변을 배회했다.

특히 외따로 떨어진 집들은 비스듬하고 구부정한 지형의 높낮이를 따라 땅 밑에서 저절로 솟아오른 자연의 일부처럼 사뿐히 놓여있었다. 앞으로는 탁 트인 바다가 출렁이고 뒤로는 야트막한 산이 있었다. 집집마다 마당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무릎 높이의 돌담이나 키 작은 나무들이 줄지어 있을 뿐 사방 어디로도 시야는 막히지 않았다.

집 마당에는 투박하게 만들어진 나무 평상이 하나씩은 있게 마련이었다. 거기에 벌러덩 누워 잠깐만 낮잠을 자도 바다와 산과 하늘과 태양과 바람을 한꺼번에 맞아들이는 상쾌하고도 달달한 꿈을 꿀 것 같았다. 마당에서 푹푹 익어가는 항아리도, 넘실넘실 춤추는 빨래도, 햇살에 간지럼 타는 나물도 같은 꿈을 꾸고 있을 것 같았다.

내 몸이 활짝 열리고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무한하게 확장되는 집, 그런 집에서 꾸는 꿈을 그리워했던 것일까. 누구의 집도 아니라서 그때 그곳에서 살던 사람이 집을 비우면 또 다른 누군가 들어와 살면 되는 집, 그런 집을 찾고 있었던 걸까. 바닷가 도처에는 걷는 내내 연달아 셔터를 눌러야 할 만큼 멋진 집이 참 많았다.

버리지 마라.

눈을 감기 며칠 전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그 마지막 집은 어머니가 일생을 마감하기 위해 전세로 얻은 지 6개월도 못된, 암 선고를 받자 어머니 일생의 소원 성취였던 당신 소유의 집을 급하게 처분하고 구한, 유일하게 하숙생을 받지 않은 집이었다. 하숙을 친 그 모든 집들에서 어머니를 따라온 세간은 고스란히 마지막 전셋집에도 옮겨와 있었다.

그 뒤 10년 남짓 혼자 살았다. 어머니 돌아가신 집에서, 반지하 원룸으로, 4층 옥탑방에서, 2층 빌라로, 다시 반지하 원룸으로 전셋집을 옮기 다니며 살았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어머니의 하숙집 세간을 그만 버려야 하나 계속 갖고 가야 하나 고민했다. 대부분 이불이나 요 아니면 그릇, 접시, 수저, 냄비 같은 부엌살림이었다.

이불과 요는 친구들이 오면 두루 쓰다가 빨아도 냄새가 날 때 하나씩 버렸다. 그렇게 다 버리기까지 꽤 걸렸다. 문제는 그릇과 접시였다. 혼자 사는 집에서 무늬와 크기가 제각각인 그릇을 12개까지 방바닥에 늘어놓고 재떨이로 쓰기도 했다. 유화 물감을 사다가 닥치는 대로 접시에 그림을 그려서 만나는 이마다 선물이라고 덥썩 주기도 했다.

해도 어머니와 하숙집의 세간은 못내 다 없어지지 않았다. 그 물건을 곳곳에 두고 사용하는 집에 새로 살 것은 없었다. 집 실내를 꾸미거나 방에 물건 들이는 것을 나는 아주 싫어했다. 책이나 옷가지는 한쪽 벽면에 몰아두고 나머지 벽과 공간은 최대한 비워두었다. 사정 모르는 친구는 남자 혼자 사는 집이 깔끔한 여관방처럼 깨끗하다고 했다.

아내와 살게 된 첫 번째 집으로 이사를 하기 전이었다. 나도 모르게 속말을 했다. 엄마, 그간 버리지 않고 잘 썼어요, 오래 썼네요, 하도 닳고 낡아서 줘도 누가 가져가지 않겠어요, 동의하시지요? 이제 버릴게요. 어머니와 하숙집의 나머지 물건은 그때 다 버렸다. 혼자 살면서도 내가 나를 하숙치듯 살아온 한 시절이 끝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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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것을 빼고 쓸수록 근사해지는 것. ⓒ 김종휘

"사람이 죽는 날은 자기 집이 완성되는 날이다"라는 아시아 속담이 있다는 것을 미국 사람이 쓴 책에서 보고 알았다. 고종석 선생은 명사 '집'이 동사 '짓다'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하고 썼다. 죽는 날까지 집을 짓는 것이 사람일까. 밥을 짓고 옷을 짓고 약을 짓고 노래를 짓고 표정을 짓고 관계를 짓고 사랑을 짓고 인생의 매듭을 짓는 것.

동갑내기인 전남진 시인은 <어느 시인의 흙집일기>에 이렇게 썼다. "저는 이 책에서 그리 큰 기술이 없어도, 한 번도 집을 지어본 경험이 없어도 자연 속에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것까지만 증명했습니다." 그는 12년간의 직장 생활을 접고 집을 떠나 혼자 집을 지었다. 땅 다지고 바닥부터 지붕까지 너와집을 지었다. 어린 딸과 같이 살 집이라 했다.

빌이라는 애칭의 윌리엄 코퍼스웨이트. 스스로 집을 짓고 자급자족하는 그는 <핸드 메이드 라이프>에 썼다. 정직한 집은 손수 지을 수 있는 집으로 구조가 단순하고 짓는 데에 적은 시간이 걸리며 미적 만족을 주되 값싸고 청소와 관리가 쉬어야 한다고. 반면 부정직한 집은 크고 복잡해서 그런 집을 짓는 것은 폭력적이고 착취적이라고.

<희망을 짓는 건축가 이야기>를 통해 샘이란 애칭의 사내를 알았다. 건축학 교수인 그는 미국의 가장 가난한 시골에서 학생들과 함께 흑인 농부들의 집과 마을 회관을 짓다가 생애를 마쳤다. 철로 조각, 벽돌, 목재, 종이박스, 타이어, 도로 표지판 등 재료는 모두 그 지역에서 나온 재활용품이었다. 책에서 본 집들은 내가 본 세상에서 가장 멋진 집이었다.

그들의 집은 쓸데없는 것을 빼서 아름다웠고 쓸수록 근사했다. 재료에 변형을 덜 가하고 가볍게 지어 언제 해체해도 해될 것이 적었다. 그렇게 자신의 한 생애를 짓다가 죽어 없어지는 날 집이 완성되는 것이다. 대대손손 물림하려고 손수 고층 아파트를 짓다가 일생을 마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사람이 짓는 것 중에 지속 가능한 것은 없었다.

흙 밟아야 해

아내는 3살적부터 25년을 줄곧 한 집에서 살았다. 아파트였다. 그 집에서 초·중·고·대학교를 다녔고 첫 직장을 다녔다. 그 후 나와 결혼하기까지 이사한 두 군데 집도 아파트였다. 11층에서 1층으로 14층으로. 그런 다음 나와 살림을 꾸린 집은 한강을 내려다보는 34층 전셋집이었다. 전망에 혹해 구했으나 아내는 시름시름했다.

그런 아내가 나주(羅州) 외가를 말할 때면 화색이 돌았다. 어린 시절 추억이겠지 했으나 인사차 갔을 때 아내가 원하는 집이 어떤 것인지 처음으로 감이 왔다. 커다란 감나무들이 문 앞을 지키고 있고, 들어서면 뜰에 온갖 풀과 꽃이 뒤엉켜있으며, 꾸미지 않은 아담한 안채 뒤로는 무성한 갈대숲이 청청한 집. 해도 그때는 잘 몰랐다.

34층에 사는 1년간 아내는 늘 푸념이었다. 허공에 붕 떠서 살면 힘이 든다고, 문 열면 바로 흙 밟을 수 있는 집에 살아야 한다고, 너만 좋다면 언제든 서울을 떠났으면 좋겠다고, 북촌이며 의정부며 김포며 파주 이야기를 건넸다. 그 집에 살면서 나는 열심히 돈 벌 궁리만 했다. 번 돈으로 다음에 좋은 집으로 이사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전망 좋은 34층에서 아내는 내내 아팠다. 두통이 잦았고 무기력증에 시달렸다. 하루종일 지내보면 그 집이 숨 쉬는 집인지 숨 막힌 집인지 알 수 있다는 아내 등을 떠밀어 서둘러 바바 여행을 떠났다. 고미와 보기도 데려와 키웠다. 그때마다 잠깐 나아지는 것 같았으나 달라지지 않았다. 아내는 그 집에 살면서 임신 4주차에 유산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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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동네 키 큰 나무보다 높이 올라가서 살지 않겠다고 했다. ⓒ 김종휘

동네에 있는 가장 키 큰 나무보다 높이 올라가면 어떤 생명도 살 수 없다고, 중력과 지기(地氣)로부터 멀어지면 심신이 허해진다고 했던 아내의 말이 마음에 박혔다. 바바 여행을 끝마친 그해 늦가을이었다. 거실 통 유리창 바깥에 큰 벌레 한 마리가 붙어있었다. 34층 높이의 유리벽에 붙어 날아가지도 못하고 떨어지지도 못한 채 죽어있었다.

고향집에서 죽고 싶다

이산(離散)을 뜻하는 그리스어 디아스포라(diaspora). 아버지와 어머니는 황해도와 평안도의 고향집을 걸어 나와 그 길로 삼팔선을 넘었다. 서울, 대전, 부산, 음성을 오가다 죽기까지 서울에 머물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생에 걸쳐 얼마나 많은 집을 전전했을까. 고향집을 떠난 이래 하루라도 두 다리 쭉 뻗고 잠을 잤던 집이 있기는 했을까.

대문자로 시작하는 디아스포라는 로마의 박해를 피해 세계 각지를 떠돈 유대인에서 비롯된 말이나, 아메리카에 끌려온 아프리카 노예들, 고향땅에서 졸지에 이방인이 된 인디언들, 아시아 각지에서 아메리카로 유입된 이주 노동자들, 이스라엘의 핍박에 쫓겨 고향을 등진 팔레스타인 사람들 등 집 떠난 모든 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디아스포라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재일 조선인, 중국 조선족, 구 소련의 카레이스키, 코리안 아메리칸 등. 남쪽 작은 이 땅에 살아도 알고 보면 온통 디아스포라의 흔적으로 가득 차 있다. 전쟁통에 남과 북으로, 산업화된 대도시로, 재개발에 밀려 인근 위성 도시로, 아시아 각지에서 오는 이주 노동자들로, 집 떠난 이들의 여행은 계속되고 있다.

모든 문명과 도시는 그렇듯 집 떠난 이들의 고단한 노동을 대가로 성장했다. 하나 그들 중 다수는 고향집으로 돌아가 잠들 수 없었다. 아버지의 장례식과 어머니의 장례식 때 구석에 쓸쓸히 앉아있던 외숙부는 넋두리를 했었다. 네 아버지도, 어머니도, 나처럼 고향집에 가서 죽고 싶었을 거라고. 외숙부 역시 고향집에 가서 눈을 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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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집은 떠난 이에게만 존재하는 지울 수 없는 꿈이다. ⓒ 김종휘

고향집은 떠난 이에게만 존재하는 특별한 꿈인지도 몰랐다. 돌아가고 싶으나 살아 돌아갈 수 있을지 몰라 그리워만 해야 하는 삼삼하고 아련한 집. 고향과 집이라는 말, 그 둘이 합쳐진 고향집이라는 말은 나에게 아득하게만 다가왔다. 아내와 내가 함께 고향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집이 있을까. 그런 집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바바 여행을 다녀온 뒤부터 집에 대해 꿈꾸기 시작한 것 같았다. 흙 밟는 집, 나주 외가 같은 집, 서울 아닌 곳에 있는 집을 원했던 아내는 물론이고 나는 나대로 바닷가에서 보았던 그 집들을 그리워했다. 방과 거실과 부엌에서는 그때 그곳에서 만난 집들이 꾸역꾸역 꿈을 꾸었다. 거기 어디에 아내와 내가 사는 우리집이 있는 꿈이었다.

바닷가 소나무 숲 너머에 우리집이 있다. 길도 따로 없고 대문도 따로 없다. 숲 어디로든 들어서 솔잎 우득우득 밟고 걷다보면 집이 나온다. 숲 바깥에는 눈에 잘 띄는 나무 한 그루 있고 거기에 우체통 걸려 있다. 하루 한번 우체통까지 걸어나가 편지를 꺼내들고 가족과 친구들의 소식을 접한다. 아 돌잔치 하는구나, 아 돌아가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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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우체통에서 편지를 꺼내들고 숲으로 들어가면 우리집이 있다. ⓒ 김종휘

우리집 1층 현관은 비를 피할 수 있는 슬레이트 처마가 있어 그대로 아담한 테라스가 된다. 나무 바닥 아래로 발 디디면 들꽃 들풀 천지고, 제각각 생긴 의자 몇 개 갖다놓고 나무 테이블 한 개 차려놓으면 근사한 카페가 된다. 노을지는 저녁이면 그곳에 앉아 아내와 함께 차나 맥주를 마시고 있다. 아무 말 없어도 우리는 좋다.

집 옆에는 허름한 창고가 한 채 있다. 내벽엔 갖은 공구가 걸려있다. 그곳에서 나무 작업부터 시작할 것이다. 나무젓가락과 숟가락부터 만들고, 나무 빨래판과 방망이를 만들고, 나무 의자를 만들고, 나무로 된 밥상을 만들고, 고미와 보기의 나무집을 만들고. 그렇게 도끼질과 대패질에 익숙해지고 나면 흙과 돌과 쇠로 작업을 할 것이다.

무엇보다 소나무 숲을 등진 마당이 바다를 향해 탁 트여 있어서 좋다. 집의 모든 방문과 창문처럼 고미 보기의 집도 바다를 향해 있어 잠들고 눈뜰 때마다 눈과 귀와 코와 뺨으로 바다를 느낄 수 있다. 물론 마당 가운데에는 평상이 있다. 거기에 앉아 밥을 먹는다. 낮잠을 잔다. 밤하늘 별을 본다. 평상에서 이불 덮고 잤다가 아침 해를 맞는다.

그곳이 우리의 고향집이 된다면, 나는 아내와 했던 결혼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함께 낭독했던 결혼 서약서의 소박한 꿈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 곳이라면 아내가 아이를 배고 낳고 기를 수 있을 것이다. 소나무 숲의 키 큰 나무들 아래에서 땅의 기를 받고 바다의 숨을 맡으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집은 매일 같이 꿈꾸는 집일 것이다.

밥 먹고 살만큼만 벌자

바바 여행을 다녀온 이듬해 1월. 우리는 장모와 형수의 도움을 받아 이사를 했다. 34층에서 내려와 흙을 밟고 살 수 있는 집을 찾기 위해 몇 군데를 살폈으나, 전세 가격이 괜찮으면 교통편이 맞지 않았고 교통이 수월하면 가격이 맞지 않았다. 아내와 살게 된 두 번째 집은 11층 아파트였다. 무려 23층이나 땅으로 내려왔으니 됐다고 아내는 웃었다.

나는 2년 전세 계약을 맺은 그 집에서 이제껏 내가 산 집들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이 자주 생겨나면 했다. 아내와 밥상을 마주보고 앉는 일, 서로 두 눈을 쳐다보는 일, 말없이 가만히 껴안고 있는 일, 간밤의 개꿈에 대해 말하고 들어주는 일, 같이 청소하고 요리하고 고미 보기를 목욕시키는 일, 틈틈이 자전거 타고 소풍가는 일.

그 일들이 저절로 일어날 리는 없었다. 밥 벌어먹고 사는 일과 돈 벌어 사는 일, 그 사이에서 지난날들과 다른 새로운 균형추를 작동시키지 않으면, 다짐과 관성을 오락가락하는 널뛰기만 잦을 수밖에 없었다. 작은 용기가 필요했다. 아내는 격려를 해주었다. 돈 더 벌려고 하루를 축내지는 마, 밥 먹고 살만큼 돈 벌면 돼, 알았지?

바바 여행을 떠나기 위해 직장에 사직서를 내고 하루 단위로 빼곡히 들어차 있던 프리랜서의 일감을 끊어야 했을 때, 소소하나 무시할 수 없는 그 돈벌이와 일정 기간 이별해야 했을 때, 나중에라도 그 돈벌이를 다시 할 수 있을까 싶은 두려움에 잠시 불안했었다. 결국 바바 여행에 나선 힘은 나라는 집에 대해 더 늦기 전에 꿈을 꾸고 싶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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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벌고 덜 쓰며 나를 충족하고 살 수 있는 집. ⓒ 김종휘

반지하 원룸에서 혼자 웅크리고 살다가 34층 고층으로 뛰어올라 한강 야경을 누리며 살았을 때 그리고 그 집에서 내려왔을 때, 나는 다시는 되돌리기 어려울 어떤 방향을 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내가 아프지 않을 집, 숨 쉴 수 있는 집, 같이 꿈꾸는 집. 덜 벌고 덜 쓰며 나를 충족하고 나를 살릴 수 있는 집으로 한발씩 나아가는 일이었다.

"간소하게 사는 법, 적게 쓰고 사는 법, 필요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법, 사는 동안 짐꾼이 필요 없을 정도로 짐을 가볍게 꾸리는 법." 이를 두고 빌은 "대단한 아름다움"이고 "대단히 풍요로운 일"이라고 했다. 나는 그 법을 배울 수 있는 집에서 살겠노라, 그런 집짓기의 소박한 매력과 일상의 마술 속에 나를 풀어두겠노라 생각했다.

오랜 망명 생활 끝에 구속을 각오하고 귀국한 한 학자의 양심 고백 때문에 경계인이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나는 그 말이 가슴에 닿지 않았다. 한때는 인문학자와 문화주의자들 사이에서 노마드(nomad)라는 말이 선풍을 일으켰었다. 그 말도 내게는 울림이 없었다. 바깥으로 내몰리고 거처 없이 떠돌며 살아본 이들에게선 그런 의식을 볼 수 없었다.

경계에서 양편을 가늠하는 일, 유목하며 삶을 여행하는 일은 집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집을 떠나선 상상할 수 없는 관념이다. 비록 누추한 피난처며 보잘것없는 집이라 해도, 돌아갈 집을 부정하면서 유토피아를 추구한다 해도, 우리는 하루하루 그 울타리 아래 있다. 노숙자에게도 집은 날마다 돌아가는 그 시간 그 자리의 허물이다.

"집이 없이 '떠난다'는 말이 가능할까. 집 속에 살던 내가 집을 떠나면 집이 내 속에 들어와 있다"고 말한 함민복 시인에게는 그 집이 소중했었나 보다. 시를 짓고 생을 짓는 것이 집이라는 것, 그 집이 완성되는 날은 자신이 사라지는 날이라는 것을, 시인은 알고 있지 싶었다. 아내와 같이 그 집을 짓고 사는 한 나는 환하게 웃을 것이다.

남은 생애에 앞으로 몇 번의 이사를 더 하게 될지, 아내와 짐을 몇 번 더 싸게 될지 모르지만, 나는 아내와 같이, 같은 꿈을 꾸는 친구들과 더불어, 집을 지으러 떠나고 또 떠날 것이다. 그때마다 어딘가에 도착해서 짐을 풀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언제나 조금은 더 오래 머물고 조금씩 더 많이 꿈꾸며 나를 짓고 있기를 바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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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의 물집, 살집, 몸집, 그리고 그 집. ⓒ 김종휘

다시 집을 생각한다. 물집. 내 손과 발에 움트는 노동의 결실. 살집. 너와 나를 오가는 사랑의 무수한 더듬이. 몸집. 생명의 안팎을 일구는 농장. 내가 사는 집은 나의 노동과 사랑을 짓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나의 몸집이다. 바바 여행을 마친 나는 집을 보러 갔다. 8년을 사신 어머니 소유의 하숙집과 어머니가 숨 거둔 그 마지막 전셋집.

무릉도원재건립추진위원회

집을 둘러싼 뜨거운 시류에 관한 한 나는 왕따였다. 명절에 모인 천척 일가는 너도나도 집에 대해 이야기했다. 얼마나 큰 평수로 옮겼나, 얼마나 값이 올랐나, 어디가 잘 나가나 하는 부동산 소문들. 그 안에 내가 사는 집, 살게 될 집, 살고 싶은 집은 없었다. 이 점은 아내가 나보다 더했다. 아내에게 집은 11층에서 더 내려가는 것이었다.

바바 여행을 마치고 홍대 앞 거리를 걷다가 반가운 이를 만났다. <너 행복하니?>에 실린 모든 사진을 찍었던 그는 우리의 결혼식 사진을 찍어주었다. 우리는 그를 찐빵이라고 불렀다. 결혼식 뒤로 통 보질 못했는데, 식사라도 같이 해야 하는데, 하는 나에게 그는 배낭을 뒤적이더니 엽서 하나를 내밀며 웃었다. 엽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복숭아 꽃피는 마을의 꿈이 시작됩니다. 도우리(桃宇理)는 촉촉한 상상을 실천하는 다정한 사람들의 커뮤니티입니다. 작은 재주, 좋은 생각을 나누어 주실 도우리 마을의 친구들을 기다립니다. www.peachtreevillage.net 무릉도원재건립추진위원회 상상실천 도우리 실천 아지트 02-6401-6933.." 나는 엽서를 아내에게 전해주었다. 아내는 웃었다.

덧붙이는 글 | 이 연재글은 6월 말 도서출판 샨티에서 <아내와 걸었다, 바바!> 제목으로 출간됩니다.

덧붙이는 글 이 연재글은 6월 말 도서출판 샨티에서 <아내와 걸었다, 바바!> 제목으로 출간됩니다.
#집 #여행 #고향 #디아스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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