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환
따라서 "민족주의적으로 우리 말의 세계화를 주장하는 것"이나 "사회 구성원을 평가하는 척도로서의 기능이 더 큰"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자는 주장은 "국어 자체가 갖고 있는 본성에 대한 반성이 없다면"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조정환은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될 테니, 그때까지 국어와 영어를 이중으로 사용하자"는 소설가 복거일씨의 '영어공용론' 주장을 "영어를 '준칙' 삼아 신자유주의적 삶을 살게 만들려는 특정 지식인의 노력"으로 규정하고 "<조선일보>와 삼성 등으로부터 적극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영어공용론' 지지 비율이 현저하게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이어 조정환은 "영어 강요 현상은 국가 단위에서 세계 질서로 편입되는, 국가 체제 전체가 지구 제국의 하나의 마디로 재편되는 과정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며 "근대를 국어와 보냈다면, 탈 근대를 영어와 함께 보낼 운명에 놓였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조정환은 영어공용론을 둘러싼 논쟁이 "비정규직, 실업자, 장애인 등 다양한 유형의 소수자들에게는 다른 동네의 싸움일 뿐"이라며 "이 논쟁은 정치·경제 등 우리 사회 거의 모든 지형에서 나타나고 있는 신자유주의 대 민족주의 논쟁 구도와 흡사하다"고 주장했다.
교량적 언어, 공통어를 사용하자
그렇다면 조정환의 대안은 무엇일까. 그는 먼저 "공용어는 국가의 언어로 명령의 언어이며, 다양한 표현 욕구를 충족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특이어' 또는 '소수어'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전제하고 이에 대한 예로 인터넷 언어를 들었다. "명령어에서 벗어나려는 젊은 세대의 나름의 노력" 또는 "다수가 사용하는 표준어에서 벗어나고자 개개인이 사용하는 특이한 표현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정환은 "이와 같은 '특이어' 또는 '소수어'는 비토나 고립에 빠질 가능성이 많은 만큼, 이들을 서로 연결할 수 있는 공통어가 필요하다"면서 "공통어는 언어적 다양성을 살리면서 서로 수평적 소통을 도모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조정환은 공통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모델로 에스페란토어를 제시했다. 그는 "교량적 역할을 하는 공통어에 대한 필요성은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코멘스키 등 철학자들에 의해 이미 오래전부터 고민됐던 문제"라며 "이와 같은 과정에서 태어난 것이 에스페란토어"라고 소개했다.
이어 조정환은 "1년 동안 배웠는데 영어보다 훨씬 쉽고 조어·표현 능력이 탁월하더라"면서 "비록 유럽에서 나온 공통어지만, 수평적 소통을 꾸려내는 대용적 언어로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끝으로 조정환은 공통어 활성화 조건으로 "적대·경쟁 대립 관계를 벗어나는 창의적인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민족국가를 해체하고 재구성해야 하며, 미국 주도의 지구 제국을 '용해'시켜야 한다"면서 "'인류인'주의적인 인간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에스페란토어를 넘어서는 새로운 공통어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