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내가 만나고 싶은 귀신 '송정떡'

역사의 질곡 속에서 아들 둘 잃은 우리 증조할머니

등록 2007.06.01 13:21수정 2007.06.05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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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로 길가에 핀 꽃도 '송정떡' 걸음을 붙들진 못했다.
신작로 길가에 핀 꽃도 '송정떡' 걸음을 붙들진 못했다.배지영
우리 아기는 태어난 날부터 잠을 자지 못하고 울었다. '수면 장애'였다. 일터에서도 환청처럼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우는 아기 옆에서 냄비 뚜껑을 던지면서 울기도 했다. 어머니는 무당을 불러와 굿까지 하셨다. 일터에서 돌아와 아기를 돌봐주는 집에 갔다가도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면 도망쳤다. 내 걸음은 빨라져서 어느새 달리기를 잘하게 됐다.


작년에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면서 반전이 일어났다. 아이는 아침마다 침대에 제 몸을 합체해 버린다. 그 무렵, 나는 달리기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걸었다. 일찍 깬 날은 새벽 4시에도 동네 공원에 간다. 공원 호수에 물안개가 끼어서 짐승이 숨쉬는 것 같은 날에는 산으로 간다. 귀신 무서운 줄 알라는 이들도 있지만 괜찮다. 되려, 만나고 싶은 귀신 한 분이 있다.

집단 학살된 큰아들 시체 몇날 며칠 걸어가 찾아내

1948년에 남한은 북한하고 영영 갈라서는 단독 선거를 하자고 했다. 나라 망치는 단독 선거를 반대하는 데모가 전국에서 일어났다. 선거 끝나고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공산당원을 처단한다는 이유로 제주도를 토벌했다.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다. 그네들은 자식을 이승에 두고 떠날 수 없어서 한라산 아래를 걷는 귀신이 되기도 했다.

우리 아빠는 단독 선거하기 두 달 전인 1948년 3월에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배희근씨는 이녁의 첫 아기가 백일이 되는 것도, 첫 걸음마 떼는 것도 보지 못하셨다. 빨갱이로 몰려 1년을 경찰에 쫓겨 다니다가 붙잡혀서 1949년 8월에 집단 학살당하셨다. 할아버지 나이 스물두 살이셨다.

수백명이 학살된 곳은 고창의 어느 마당바위였다. 사람 사는 동네마다 있게 마련인 마당 바위, 어디쯤인지도 모르는 그 곳을 몇 날 며칠을 걸어 찾아낸 사람은 송정할머니(광주 송정리에서 시집오셔서 증조할머니 댁 호가 '송정떡')셨다.


음력 7월, 햇볕은 뜨겁고 피부에 감겨드는 눅눅함은 절정에 달하는 때, 총에 맞아 숨이 끊긴 사람들 몸은 녹아내려서 서로 엉겨 붙기 시작했다.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었다.

몇백구의 시체를 뒤적이며 다닌 분도 송정할머니셨다. 큰아들 희근이를 알아볼 수 없어서, 도망 다니더라도 입성이 바르라고, 이녁이 바느질해서 만들었던 옷을 찾아내셨다. 겨울이었다면, 먼 길 떠나는 아들 얼굴이라도 쓸어볼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녁 아들 몸에는 이미 굼벵이까지 슬어 있었다.


"희근아, 가자. 희근아, 집에 가자."

'송정떡' 가슴 속에 든 울음은 달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송정할머니는 울음이 터지면, 새벽이나 한밤중에도, 눈이 오거나 비가 와도, 걸어다니셨다.
'송정떡' 가슴 속에 든 울음은 달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송정할머니는 울음이 터지면, 새벽이나 한밤중에도, 눈이 오거나 비가 와도, 걸어다니셨다.배지영
송정할머니는 정신을 놓지도 않고, 아들의 주검과 함께 걸어오셨다. 그러고는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우리도 찾아갈 수 없는, 깊고 먼 산에 큰아들을 묻으셨다. 막 스물을 넘긴 며느리는 재가시키셨다. 그러고나서 송정떡은 큰아들의 유일한 핏줄인 '내 행한이'를 키우셨다.

올해 예순이 된 송정떡의 '내 행한이'는 할머니 얘기를 꺼낼 때면, 아직까지도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한다.

"보통 양반은 아니었제. 자식이 그렇게 됐어도 얼마나 기세가 당당했는지 몰라야. 여장부였제. 진짜로 생각이 앞서간 양반이었다이."

그 옛날, 물자가 귀하던 시절에도 옷을 좋아하셔서 동네 나가는 옷, 밭에 나가는 옷, 장에 가는 옷, 더 멀리 가는 옷이 따로 있었다. 자식 제사를 지내면서도 아무에게도 아들 얘기를 꺼내지 않으셨다. 아빠도 송정할머니한테 딱 한 번 들었을 뿐이어서 할아버지가 그렇게 가신 고창 마당바위가 어디쯤인지도 모르고, 할아버지 묻힌 산도 찾아갈 수 없다.

아빠는 송정할머니의 바람대로 큰 인물이 되기 위해 국민학교 3학년 때 광주로 유학 갔다. 그러나 아기였을 때부터 "할매"를 찾으며 울었던 아빠는 중학교에 들어갈 때 할머니 곁으로 내려왔다. 송정할머니와 증조할아버지는 '내 행한이' 없는 적적함을 견디지 못하셨다. 그 뒤로 아빠는 우리 4남매를 낳을 때까지 줄곧 두 분과 함께 살았다.

막내아들 군대서 잃었을 때도 한정 없이 걸어 다녀

'송정떡'의 잘 생기고 똑똑한 막내 아들, 사진 오른쪽.
'송정떡'의 잘 생기고 똑똑한 막내 아들, 사진 오른쪽.배지영
송정할머니는 글자를 몰랐지만 동네에서 길쌈 대장이셨다. 길쌈할 때 베를 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고난이도의 일이었는데 마을에서 할머니가 가장 잘 하셨다. 송정떡 밭은 풍성했고, 이녁 손마디가 닳을 만큼 논일도 잘 하셨다. 이녁이 가진 것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좋아했고, 어디서든 앞에 서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셨다.

그 때 송정할머니 집은 시골에서 크게 부자도 아니고, 가난하지도 않았다. 가슴에 묻은 큰아들만 아니라면 평탄한 세월이라고 말해도 좋을 어느 봄날이었다.

전라남도 도지사 상을 몇 번이나 탔던, 송정할머니의 잘 생기고 똑똑한 막내아들이 군대에서 사고로 죽었다. 혼인도 안 올린 스물두 살 총각이라서 장례식도 없이 밤에 산에다 묻었다.

송정할머니는 죽은 아들들이 보고 싶으면 우셨다. 저 밑바닥부터 올라온 울음은 쉬 그쳐지지 않아서 갑자기 집을 나서 한정 없이 걸으셨다. 피붙이들을 보러 시집보낸 딸네 집에도 가고, 이녁 친정에도 다니셨다. 며칠이 걸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집으로 걸어오는 송정할머니 모습은 담대하게 보이셨다고 한다.

아무리 걸어도 가슴 속에 든 울음을 달랠 수 있었을까

"속이 속일라디야? 당신 속에는 항상 그런 뭣이 있었제. 죽지 못해서 산 세월이었제."

엄마는 앞서 간 두 명의 아들 제삿밥을 차리는 송정할머니와 9년을 살았다. 나와 남동생을 임신했을 때에는 아빠를 생활력 없게 키운 송정할머니를 미워했다. 할머니는 단추가 '짱쪼롱하게' 박힌 스웨터를 입으셨는데 엄마는 그것도 싫었다. 태중 정서 때문인지, 나와 남동생은 어릴 때에 단추 달린 옷을 입지 못했고, 방바닥에 떨어진 단추를 보면 기겁을 했다.

엄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증조할아버지는 예쁜 분이셨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는 '내 행한이' 색시인 우리 엄마가 대견해서 부엌문을 열고, 손부가 아궁이에 불 때는 모습을 보면서도 흐뭇해하셨다. 엄마가 세 번째 딸을 낳아 낙담하고 있을 때도 "아가, 암퇘지 세 마리가 오는 꿈을 꿨씨야, 이 다음에가 아들이다이"하셨다.

증조할아버지는 엄마가 네 번째 아이를 가졌을 때에 손수 오리 요리를 하셨다. 엄마보고는 "아가, 한아씨(할아버지) 보는 디서 한 입만 먹어봐야"하셨다. 가마솥을 연 순간, 엄마는 입덧을 격하게 했다. 오리는 본디 모습 그대로 솥에서 음식이 되어 있었다. 증조할아버지는 앓아누운 적도 없이, 아기처럼 배내똥을 싸고, 여든 살에 돌아가셨다.

우리 집 최고의 경사는 일찍 혼인시킨 송정떡의 '내 행한이'가 딸 셋을 낳고, 드디어 아들을 낳던 순간이었다. 얼마나 감격했으면 송정할머니는 "우리도 아들 낳았씨야"하면서 마르고 처진 엉덩이를 내놓고 춤을 추셨다. 춤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다음 날에는 손부 미역국도 안 끓여주고 '내 행한이'가 아들 낳았다고 장터까지 나가서 자랑하셨다.

내 동생 지현이는 터를 팔았다(밑으로 남동생을 보는 것)고 송정할머니가 예뻐하셨다. "아이고 내 시째를 울리다니…"하면서 우량아였던 네 살짜리 지현이를 늘 업고 다니셨다. 호불호가 분명하신 분이셨다. '행한이 새끼'여도 밥상만 들어오면 눈물바람을 했던 나는 미워하셨다. 더구나 나는 '외약손잡이'여서 송정할머니한테 박힌 미움털이 빠지지 않았다.

가슴 속에 든 울음은 달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송정할머니는 때가 되면 어딘가를 걸어다녀야 하셨다. 어느 날 밤, 먼 데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쓰러졌는데 중풍이셨다. 송정할머니는 더 이상 예쁜 옷을 입을 수도, 걸어다닐 수도 없게 되자, 두 번의 자살 시도 끝에 이녁이 바라는 뜻을 이루셨다.

비로소 송정떡의 걸음과 눈물도 멈추었다.

나는 송정할머니 닮아서 어디론가 자꾸 가고 싶다. 그러나 울지 않는다.
나는 송정할머니 닮아서 어디론가 자꾸 가고 싶다. 그러나 울지 않는다.배지영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라도 닷컴> 6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전라도 닷컴> 6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단독 선거 #집단 학살 #군대 #중풍 #길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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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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