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떡'의 잘 생기고 똑똑한 막내 아들, 사진 오른쪽.배지영
송정할머니는 글자를 몰랐지만 동네에서 길쌈 대장이셨다. 길쌈할 때 베를 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고난이도의 일이었는데 마을에서 할머니가 가장 잘 하셨다. 송정떡 밭은 풍성했고, 이녁 손마디가 닳을 만큼 논일도 잘 하셨다. 이녁이 가진 것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좋아했고, 어디서든 앞에 서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셨다.
그 때 송정할머니 집은 시골에서 크게 부자도 아니고, 가난하지도 않았다. 가슴에 묻은 큰아들만 아니라면 평탄한 세월이라고 말해도 좋을 어느 봄날이었다.
전라남도 도지사 상을 몇 번이나 탔던, 송정할머니의 잘 생기고 똑똑한 막내아들이 군대에서 사고로 죽었다. 혼인도 안 올린 스물두 살 총각이라서 장례식도 없이 밤에 산에다 묻었다.
송정할머니는 죽은 아들들이 보고 싶으면 우셨다. 저 밑바닥부터 올라온 울음은 쉬 그쳐지지 않아서 갑자기 집을 나서 한정 없이 걸으셨다. 피붙이들을 보러 시집보낸 딸네 집에도 가고, 이녁 친정에도 다니셨다. 며칠이 걸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집으로 걸어오는 송정할머니 모습은 담대하게 보이셨다고 한다.
아무리 걸어도 가슴 속에 든 울음을 달랠 수 있었을까
"속이 속일라디야? 당신 속에는 항상 그런 뭣이 있었제. 죽지 못해서 산 세월이었제."
엄마는 앞서 간 두 명의 아들 제삿밥을 차리는 송정할머니와 9년을 살았다. 나와 남동생을 임신했을 때에는 아빠를 생활력 없게 키운 송정할머니를 미워했다. 할머니는 단추가 '짱쪼롱하게' 박힌 스웨터를 입으셨는데 엄마는 그것도 싫었다. 태중 정서 때문인지, 나와 남동생은 어릴 때에 단추 달린 옷을 입지 못했고, 방바닥에 떨어진 단추를 보면 기겁을 했다.
엄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증조할아버지는 예쁜 분이셨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는 '내 행한이' 색시인 우리 엄마가 대견해서 부엌문을 열고, 손부가 아궁이에 불 때는 모습을 보면서도 흐뭇해하셨다. 엄마가 세 번째 딸을 낳아 낙담하고 있을 때도 "아가, 암퇘지 세 마리가 오는 꿈을 꿨씨야, 이 다음에가 아들이다이"하셨다.
증조할아버지는 엄마가 네 번째 아이를 가졌을 때에 손수 오리 요리를 하셨다. 엄마보고는 "아가, 한아씨(할아버지) 보는 디서 한 입만 먹어봐야"하셨다. 가마솥을 연 순간, 엄마는 입덧을 격하게 했다. 오리는 본디 모습 그대로 솥에서 음식이 되어 있었다. 증조할아버지는 앓아누운 적도 없이, 아기처럼 배내똥을 싸고, 여든 살에 돌아가셨다.
우리 집 최고의 경사는 일찍 혼인시킨 송정떡의 '내 행한이'가 딸 셋을 낳고, 드디어 아들을 낳던 순간이었다. 얼마나 감격했으면 송정할머니는 "우리도 아들 낳았씨야"하면서 마르고 처진 엉덩이를 내놓고 춤을 추셨다. 춤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다음 날에는 손부 미역국도 안 끓여주고 '내 행한이'가 아들 낳았다고 장터까지 나가서 자랑하셨다.
내 동생 지현이는 터를 팔았다(밑으로 남동생을 보는 것)고 송정할머니가 예뻐하셨다. "아이고 내 시째를 울리다니…"하면서 우량아였던 네 살짜리 지현이를 늘 업고 다니셨다. 호불호가 분명하신 분이셨다. '행한이 새끼'여도 밥상만 들어오면 눈물바람을 했던 나는 미워하셨다. 더구나 나는 '외약손잡이'여서 송정할머니한테 박힌 미움털이 빠지지 않았다.
가슴 속에 든 울음은 달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송정할머니는 때가 되면 어딘가를 걸어다녀야 하셨다. 어느 날 밤, 먼 데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쓰러졌는데 중풍이셨다. 송정할머니는 더 이상 예쁜 옷을 입을 수도, 걸어다닐 수도 없게 되자, 두 번의 자살 시도 끝에 이녁이 바라는 뜻을 이루셨다.
비로소 송정떡의 걸음과 눈물도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