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활하고 열린 태도의 젊은이들. 프랑스에서 온 프랑소와(사진 오른쪽)과 카르멘(사진 왼쪽), 뒤로 바텐더가 보입니다.이은비
골목은 여전히 사람들로 넘쳐나고, 누에바 광장으로 가는 길목의 가게마다 빼곡히 사람들이 들어차 있습니다. 바야흐로 지금은 스페인 사람들의 저녁식사시간입니다. 가게마다 불에 구운 하몬 냄새며, 향신료와 레몬, 올리브기름에 튀긴 해물냄새가 흘러나와서 뱃속은 이미 아우성입니다.
골목을 지나 누에바 광장으로 나가니, 저 같이 광장에서 약속을 잡은 젊은이들이 가로등 불을 받으며 책을 읽거나 담배를 피우고 있습니다. 광장 뒤로는 어둠에 잠긴 산타아나 교회의 성모마리아 상이 광장을 굽어보고 있습니다.
이런 느낌은 참 새롭습니다. 서울에 있을 때는 '강남역 7번 출구 앞'이나 '이대역 2번 출구 앞'이라는 식으로 약속장소를 정하곤 했는데, 여기 젊은이들은 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오늘 밤 마을광장에서 만나요'라고 약속을 잡겠지요. 정말 고색창연한 곳입니다.
마침 제 때 맞춰 나온 토마스와 함께 그의 독일 가이드북이 추천한다는 레스토랑으로 가 봤습니다. 메뉴는 스페인어를 하나도 읽을 줄 모르는 저를 대신해 토마스가 시켰지요.
영어는 물론 스페인어까지 제법 구사하는 게 너무 신기해서, "어떻게 그렇게 스페인어를 잘 해?"라고 물으니 자기네들은 초등학교 때 스페인어를 배운다고 하는군요. 우리나라에서 제2 외국어를 배우듯이 유럽에서도 영어와 다른 나라 말을 함께 배우나 봅니다.
그때 반성했습니다. 아, 나도 돌아가면 외국어 열심히 해야지. 적어도 바로 옆에 붙어있는 일본이랑 중국어 정도는 할 줄 알아야겠다, 라고. 이후 여행하면서도 무수히 느꼈지만, 유럽은 나라들이 붙어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EU연합으로 묶여있어서 그런 건지, 주변 나라에 대해 해박합니다.
식사를 끝내고 나니 토마스가 먼저 계산을 해버리는군요. 제가 부담스러워하며 반반씩 내야한다고 주장하자, "그럼 네가 술을 쏘든지"랍니다. 오호, 세계 어디를 가든 친구가 되는 단계는 다 비슷하군요.
다시 거리로 나가 북적북적한 엘비라(Elvira) 거리 입구에서 한 눈에 들어오는 바르(Bar)로 무작정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이 가득한 바르에 앉아 메뉴를 보니, 저렴한 가격의 스페인 와인들이 보입니다.
우리는 2002년도 스페인산 로제와인에 기본 안주로 나온 올리브를 까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동종업계 사람인만큼, 주로 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했지요. 토마스는 한국을 한 번 정도 여행한 적도 있고 한국에 관한 칼럼도 쓴 적 있다고 했습니다.
독일인 토마스가 본 한국은
"오! 그래? 뭐에 대해 썼는데?"라고 물으니 "한국의 IT 물결에 대한 이야기"를 썼답니다. 토마스는 자신이 그 기사를 취재하면서도 정말 놀랐다면서, "한국이야말로 진정한 IT선진국이지. 독일은 아무것도 아냐. 외국에 나가봐. 자동차는 현대, 전자기계는 LG랑 삼성, 핸드폰도 삼성이지. 하지만 독일제 핸드폰 메이커를 아는 사람이 누가 있지? 아무도 없어!"라고 피력하더군요.
"이봐. BMW랑 아우디의 나라에서 그런 말 하면 웃겨 보여"라고 응수하자, "아냐. 독일은 한 물 갔다니까. 어떤 사람이 나한테 '한국에서는 퇴근 후에 다들 인터넷을 하거나 게임을 한다'고 말하기에 '미쳤어? 설마!'라고 생각했는데 취재하고 보니까 정말이더군. 나 그거 보고 엄청 놀랐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불과 3일전, 한국에서의 생활 사이클이 생각나면서 순간 제 자신이 불쌍하더군요. 병을 기울이며 제가 말했습니다.
"그건 한국 사람들이 즐길 거리가 없기 때문이야. 한국 사람들, 불쌍해. 하루 12시간 씩 미친 듯이 일하고 나면 저녁 8시가 되지. 그러고 나면 고작 한다는 게 영화보거나 술 먹기, 노래방가기, 차 마시기가 다야. 아니면 순서 바꿔서 하거나. 여기 사람들을 봐."
저는 바에 기대서 이야기하거나 웃고 있는 사람들, 바깥에서 놀러 다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일이 끝난 뒤에도 즐길 거리가 많잖아. 그게 차이점인거야. 게다가 일하는 시간도 우리나라에 비해서 짧고."
"흐음.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건데, 왜 그렇게 한국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지?"
토마스가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이 물어봅니다.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미친 듯이 일했던 지난 3년간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더군요. 새벽 4시까지 일하다가 다음날 오전 8시 30분까지 출근했던 일이나, 주말도 휴일도 반납하고 오로지 일만 했던, 뭐하나 아름답지 않은 기억들이 머릿속을 점멸합니다.
"아, 나도 정말 열심히 일하고 싶지 않은데 다들 그렇게 일해서 어쩔 수 없이 열심히 일하게 돼. 한국은 다른 자원이 없어. 사람뿐이지. 그러니 사람들이 열심히 일해야 하는 거야."
그러자 토마스가 웃는군요.
"그 점은 독일이랑 같네. 우리나라도 광물자원이 풍부하지 않아. 하지만 우린 그렇게까지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구."
야. 독일이랑 우리나라랑 사정이 같냐. 하지만 그런 말은 꾹 참고(사실 영어로 설명할 기운도 없습니다) 대신 "그래도 너희 나라도 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열심히 일했잖아"라고 따졌습니다.
그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웃고 떠드니 어느 새 병이 다 비었습니다. 그날 내내 말라가에서부터 돌아다녔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저는 토마스와 작별인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는 "내일은 어디 여행할 참이야?"라고 묻습니다.
"내일 아침 알함브라 구경하고 그 뒤 세비야로 갈 생각이야."
"세비야! 정말 아름다운 곳이지. 나는 여기 오기 전에 세비야 다녀왔는데, 좋은 숙소 추천해줄게"라고 말하는데 솔직히 너무 졸려서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혼자 여행을 잘 해왔으므로, 세비야에도 도착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이상한 자신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작별인사를 나누고, "인연이 있으면 또 보겠지"라는 상투적인 인사를 한 뒤 호스텔로 돌아왔습니다. 오아시스 호스텔은 이제부터 시작인 모양입니다.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게 거의 클럽 분위깁니다. 저마다 손에 술잔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 자기소개를 하는 젊은이들을 가로질러, 위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아아, 오늘(2월 14일) 하루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부디 오늘밤은 푹 잘 수 있길.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2007년 2월 13일부터 일주일간 스페인을 여행한 뒤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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