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딸 나리가 제천간디학교에 입학하던 날 사진.이광구
강화로 이사온 초기 몇 년 동안의 얘기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강화로 이사온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95년도에 노동자협동기업을 만들겠노라고 큰소리쳤다가 6개월 만에 망한 탓도 있다. 빚을 많이 져서 전세방 값을 빼서 일부 빚을 갚기 위함이었다.
강화도에 얻은 집은 방이 셋인 빈 집이었는데, 사랑방은 불을 때는 온돌방이었다. 기름값이 무척 비싼 IMF 때라 겨울엔 사랑방에 불을 때고 다섯 식구가 옹기종기 붙어 잤다. 자고 나면 몸이 개운하고 좋았다. 다시 집을 짓게 되면 방 하나는 꼭 온돌방으로 하고 싶다.
농촌에 살다 보니 돈은 적게 들었다. 텃밭을 이용해 반찬거리를 만들어 먹고, 봄엔 들판에서 나물을 캐먹는 맛도 좋았다. 가게가 멀어 아이들이 군것질할 일이 거의 없다. 또 부자 아이들이 없으니 아이들이 비싼 물건을 사달라고 보채는 일도 없다.
공기가 맑아서 그런지 아이들도 거의 아프지 않았다. 막내 보리가 95년 9월에 태어났는데, 100일도 되지 않았을 때 모세기관지염으로 입원한 적이 있다. 공장지대가 가까이 있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강화로 이사갈 결심을 할 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살게 하자.'
그러나 이런 이유들보다 더 중요한 계기는 아이들 교육 문제였다. 1997년 2월 어느 일요일 기독교방송에서 어떤 초등학교 선생님(노미화 선생님)이 말하는 걸 듣게 됐다. 대단한 주장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속에 와 닿았다. 마침 그날 오후 우리는 티코를 타고 강화로 놀러갔다. 잘 아는 성공회 천경배 신부가 있는 마리산(마니산은 일본사람들이 바꾼 명칭이라고 한다) 기슭을 찾았다.
"노미화 선생님 여기 강화에 살아요."
천 신부는 가깝게 지내는 사이라고 말했다. 그 전 해에 집을 짓는데, 자신이 가서 도와주기도 했다고 했다. 그 노미화 선생님이 그해 1학년 담임을 맡을 거라는 말도 했다. 그 때가 나리가 학교에 입학할 시기였다.
"나리에게 그 선생님을 만나게 해줘야겠다."
나는 학교 다니면서 존경할만한 선생님을 별로 만나지 못했다. 오히려 나쁜 감정이 아직도 남아있는 선생님들이 더 많다. 내 아이들에게는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당시 나는 부평에 있는 대우자동차에 다니고 있었다. 그 다음주 일요일에 다시 강화에 가서 부평까지 가보았다. 1시간 정도 걸렸다.
'이만하면 다닐 만 하다.'
이렇게 해서 강화도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주변에 우리처럼 도시에서 살다 강화로 이사온 가정들이 여럿 있었다.
컨테이너 서당에서 훈장님께 배우다
학교에 다니기 전 아이들을 모아 한 집에서 공동육아도 했다. 서당부활운동을 하는 송순재 교수님을 초빙해 강연을 듣고 토요일에만 하는 서당도 열었다.
"조상의 전통적인 교육사상을 배워야 합니다."
송순재 교수의 핵심 주장이었다. 서양문명을 받아들이더라도 우리에 맞는 교육사상을 다 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조상이 만든 한자로 표현된 책을 통해 한자가 아니라 그 안에 배인 교육사상을 배우자는 거였다.
집터가 넓은 순모네 집에 컨테이너를 갖다놓고 교실로 썼다. 훈장은 교수님 소개로 이창호 선생님을 모셨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전 학년을 포괄했다. 일반학교 같으면 수업이 안 될 것 같지만, 여기서는 수업이 잘 진행됐다.
나는 강화읍 터미널에서 훈장선생님을 모시는 일을 맡았다. 매주 각 가정을 돌아다니면서 점심을 대접해 드렸다. 아이들이 수업을 듣는 동안 부모들도 모여 술자리를 갖기도 하고, 난로나 책꽂이를 만들기도 했다. 컨테이너에 현판도 달았다. 이름 하여 마리서당.
대보름날엔 서당 앞 너른 들판에서 쥐불놀이도 했다. 봄엔 진강산에 올라 보물찾기도 하고, 진달래꽃으로 전을 부쳐먹기도 했다. 어린이날엔 학교를 빌려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운동회를 했다. 그즈음 일본에 출장가서 만났던 선배 말이 실감나는 분위기였다.
"어른들이 친해지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친해지지."
아이들이 처음 서당에서 배운 책은 <사자소학(四字小學)>이었다. 첫 구절이 이렇게 시작된다.
'부생아신(父生我身)하시고, 모국오신(母陱我身)이로다.'(아버지께서 내 몸을 낳으시고, 어머니께서 내 몸을 기르셨다.)
큰 소리로 읽게 하고 뜻을 풀이해 주었다. 나와서 칠판에 써보게도 했다. 어른인 우리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이런 인간과 우주의 탄생원리에 대해 배우지 않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은 '바둑아, 나하고 놀자'가 아닌가?
그 즈음 아이들이 부모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부생아신!"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 뜻을 이해하고 말을 듣곤 했다. 서당이 해체된 뒤에도 2대 훈장인 황선진 선생님을 중심으로 교육문제 연구를 계속했다. 몇 년 후 황선진 선생님은 마리서당의 이름을 이어받아 '마리학교'란 대안중학교를 만들었다. 나리와 새별이는 마리서당 출신으로 다시 마리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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