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생활 10년, 아이들이 '명품'으로 자랐다

[나만의 자녀 교육법③] 교육 때문에 도시 버리고 시골로 가다

등록 2007.06.08 19:26수정 2007.06.13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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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딸 나리는 91년 1월에 태어났다. 서울 구로동 단칸방에서 연탄을 때던 시절이었다. 1회용 기저귀를 쓰지 않고 옛날식으로 헝겊기저귀를 썼다. 돈도 아끼고, 환경도 보호하고, 애한테도 좋으라고 그랬다. 다행히 나리가 건강해서 똥도 품질이 좋았다. 적당히 굳은 똥을 털어내면 자국만 남을 뿐 깨끗하게 떨어졌다. 연탄불에 삶아서 빨았다.

지난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란 영화가 유행했다. 명품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 꼭 비싼 게 명품이 아니란 생각도 하게 됐다. 값보다는 개별성과 품격이 더 중요하다. 그즈음 아이를 가진 지 몇 달 안 되는 지점장과 얘기하다 기저귀 얘기가 나왔다.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그 역시 1회용 기저귀를 쓴다고 했다. 헝겊 기저귀 삶던 얘기를 하다 이렇게 말했다.

"명품 가운데 뭐가 가장 명품일까?"
"……."
"사람이 가장 명품 아닐까? 그 명품을 다루는데, 소중하게 해야지 어떻게 1회용 기저귀를 쓰나?"

즉흥적으로 나온 농담이었는데, 오히려 하고 나서 두고두고 그 맛이 되살아나는 거였다.

'맞아. 사람이 제일 귀한 명품이야.'

[큰 딸 나리] "바빠서 피아노 배울 시간 없어"

역사기행에 참가한 아내(가운데줄 왼쪽에서 두 번째), 나리(제일 뒷줄 왼쪽에서 첫 번째. 얼굴만 살짝 나온), 보리(첫 줄 왼쪽에서 두 번째).
역사기행에 참가한 아내(가운데줄 왼쪽에서 두 번째), 나리(제일 뒷줄 왼쪽에서 첫 번째. 얼굴만 살짝 나온), 보리(첫 줄 왼쪽에서 두 번째).이광구
그 명품(아이)의 개성을 살리고 품격있게 키우는 일이야말로 가장 재밌고 행복한 일이다. 강화에 온 지 만 10년이 넘었다. 가장 보람된 일은 지난 10년 동안 우리 세 아이들이 명품으로 자라온 것 아닐까?


97년 봄. 나리가 조산초교 1학년에 막 들어갔을 때다. 나리에게 피아노 학원에 다녀보라고 했다. 그런데 나리는 싫다고 한다.

'허, 이상한 일이다.'


아무리 내 어릴 때와 시대 분위기가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돈 대줘 피아노 배우라는데 싫다니?

"왜 피아노 학원 안 간다는 거지?"

나리한테서 뜻밖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아빠, 나 바쁘단 말야."

'바쁘다고? 어린 꼬마가 뭐 바쁜 일이 있을까?' 다시 물었다.

"뭐 하느라 바쁜데?"

역시 뜻밖의 대답이다.

"놀기 바빠~."

그 때 우리 가족은 경기도 부천 오정동에서 강화 양도면 조산리 조구머리 마을로 이사 왔다. 허름한 빈집을 빌려 살았는데, 살림하는 애엄마야 힘들었겠지만 아이들은 너무도 재미있어 했다. 맘껏 뛰어놀 들판, 집 바로 옆 커다란 느티나무, 해인이·새별이·혜원이 친구들. 모두모두 새롭고 신기한 모습들이었을 것이다.

[둘째 온달이] '1표 낙선'을 딛고 반장 감투달다

난 어릴 때 반장 같은 감투를 써본 적도 없거니와, 그런 선거에 출마할 맘도 먹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다른가 보다. 둘째인 온달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반장선거에 출마했다고 한다. 투표 결과 단 1표를 얻었다고 한다.

"그 한 표는 누가 찍어준 거니?
"……."

말이 없다. 다그쳐 물었다.

"이온달! 네가 찍은 거 아냐?"
"응"

하하, 참 재밌는 녀석이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도 다 한두 표밖에 못 얻었다고 한다. 세 표 얻은 아이가 선출됐다나? 출마한 아이가 여덟 명인가 했다니까. 그리고 1년이란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아침, 서울 친척집에서 자고 지하철로 출근하고 있는데, 나리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여보 기쁜 소식 하나."
"……."

무슨 기쁜 소식일까? 잠깐 설레었다.

"온달이가 반장이 됐어."

자기는 안하려고 했는데, 친구들이 밀어줬다나. 무려 10표나 얻어 뽑혔다고 한다. 스무 명 좀 넘는 숫자일 텐데, 열 표면 굉장한 표다.

"환도나 동녁이가 밀었겠군."

지난 봄방학 때 온달이랑 친구들이 옆집 재범이 아빠를 따라 목포에 나흘간 놀러갔다 왔다. 아이들 여섯이 식사준비도 하고, 설거지도 했다고 한다. 재범이 아빠는 차려주는 밥을 먹기만 했다나. 녀석들 그렇게 합숙훈련을 했으니 꽤 친해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친구들 가운데 한 명을 반장으로 내세운 것일 거다.

[막내 보리] 청소·설거지 잘하는 '어지럽기기 왕'

막내 보리는 나리 언니와 온달이 오빠의 연합공격에도 끄덕하지 않는 야무진 놈이다. 어지간하면 '앵'하고 울거나 엄마 아빠의 도움을 요청할 만도 한데, 보리는 끝까지 말대꾸를 한다. 느린 말투지만 또박또박한 목소리다. 아마 보리는 자기 소신이 분명한 아이로 클 것 같다.

보리는 언니 오빠에 비해 엄마 아빠 말을 잘 듣고 거들어주려고 한다. 설거지를 하기도 하고, 방청소를 하기도 한다. 물론 제일 많이 어지럽히는 것도 보리지만.

그런 보리가 한번은 냉이를 캐왔다. 뒷집 언니들 하는 걸 보고 따라한 모양이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정말 고사리보다 더 작은 냉이들만 캐왔다. 나리엄마가 그걸 다듬는 걸 보니, 흙 한줌에 냉이 한 줌이다.

'허, 그래도 이제 보리가 한 살림 할 모양이다.'

보리가 초등학교에 막 입학할 무렵 얘기다.

농촌에 살아서 좋은 이유... 첫번째는 '교육'

첫째 딸 나리가 제천간디학교에 입학하던 날 사진.
첫째 딸 나리가 제천간디학교에 입학하던 날 사진.이광구
강화로 이사온 초기 몇 년 동안의 얘기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강화로 이사온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95년도에 노동자협동기업을 만들겠노라고 큰소리쳤다가 6개월 만에 망한 탓도 있다. 빚을 많이 져서 전세방 값을 빼서 일부 빚을 갚기 위함이었다.

강화도에 얻은 집은 방이 셋인 빈 집이었는데, 사랑방은 불을 때는 온돌방이었다. 기름값이 무척 비싼 IMF 때라 겨울엔 사랑방에 불을 때고 다섯 식구가 옹기종기 붙어 잤다. 자고 나면 몸이 개운하고 좋았다. 다시 집을 짓게 되면 방 하나는 꼭 온돌방으로 하고 싶다.

농촌에 살다 보니 돈은 적게 들었다. 텃밭을 이용해 반찬거리를 만들어 먹고, 봄엔 들판에서 나물을 캐먹는 맛도 좋았다. 가게가 멀어 아이들이 군것질할 일이 거의 없다. 또 부자 아이들이 없으니 아이들이 비싼 물건을 사달라고 보채는 일도 없다.

공기가 맑아서 그런지 아이들도 거의 아프지 않았다. 막내 보리가 95년 9월에 태어났는데, 100일도 되지 않았을 때 모세기관지염으로 입원한 적이 있다. 공장지대가 가까이 있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강화로 이사갈 결심을 할 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살게 하자.'

그러나 이런 이유들보다 더 중요한 계기는 아이들 교육 문제였다. 1997년 2월 어느 일요일 기독교방송에서 어떤 초등학교 선생님(노미화 선생님)이 말하는 걸 듣게 됐다. 대단한 주장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속에 와 닿았다. 마침 그날 오후 우리는 티코를 타고 강화로 놀러갔다. 잘 아는 성공회 천경배 신부가 있는 마리산(마니산은 일본사람들이 바꾼 명칭이라고 한다) 기슭을 찾았다.

"노미화 선생님 여기 강화에 살아요."

천 신부는 가깝게 지내는 사이라고 말했다. 그 전 해에 집을 짓는데, 자신이 가서 도와주기도 했다고 했다. 그 노미화 선생님이 그해 1학년 담임을 맡을 거라는 말도 했다. 그 때가 나리가 학교에 입학할 시기였다.

"나리에게 그 선생님을 만나게 해줘야겠다."

나는 학교 다니면서 존경할만한 선생님을 별로 만나지 못했다. 오히려 나쁜 감정이 아직도 남아있는 선생님들이 더 많다. 내 아이들에게는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당시 나는 부평에 있는 대우자동차에 다니고 있었다. 그 다음주 일요일에 다시 강화에 가서 부평까지 가보았다. 1시간 정도 걸렸다.

'이만하면 다닐 만 하다.'

이렇게 해서 강화도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주변에 우리처럼 도시에서 살다 강화로 이사온 가정들이 여럿 있었다.

컨테이너 서당에서 훈장님께 배우다

학교에 다니기 전 아이들을 모아 한 집에서 공동육아도 했다. 서당부활운동을 하는 송순재 교수님을 초빙해 강연을 듣고 토요일에만 하는 서당도 열었다.

"조상의 전통적인 교육사상을 배워야 합니다."

송순재 교수의 핵심 주장이었다. 서양문명을 받아들이더라도 우리에 맞는 교육사상을 다 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조상이 만든 한자로 표현된 책을 통해 한자가 아니라 그 안에 배인 교육사상을 배우자는 거였다.

집터가 넓은 순모네 집에 컨테이너를 갖다놓고 교실로 썼다. 훈장은 교수님 소개로 이창호 선생님을 모셨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전 학년을 포괄했다. 일반학교 같으면 수업이 안 될 것 같지만, 여기서는 수업이 잘 진행됐다.

나는 강화읍 터미널에서 훈장선생님을 모시는 일을 맡았다. 매주 각 가정을 돌아다니면서 점심을 대접해 드렸다. 아이들이 수업을 듣는 동안 부모들도 모여 술자리를 갖기도 하고, 난로나 책꽂이를 만들기도 했다. 컨테이너에 현판도 달았다. 이름 하여 마리서당.

대보름날엔 서당 앞 너른 들판에서 쥐불놀이도 했다. 봄엔 진강산에 올라 보물찾기도 하고, 진달래꽃으로 전을 부쳐먹기도 했다. 어린이날엔 학교를 빌려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운동회를 했다. 그즈음 일본에 출장가서 만났던 선배 말이 실감나는 분위기였다.

"어른들이 친해지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친해지지."

아이들이 처음 서당에서 배운 책은 <사자소학(四字小學)>이었다. 첫 구절이 이렇게 시작된다.

'부생아신(父生我身)하시고, 모국오신(母陱我身)이로다.'(아버지께서 내 몸을 낳으시고, 어머니께서 내 몸을 기르셨다.)

큰 소리로 읽게 하고 뜻을 풀이해 주었다. 나와서 칠판에 써보게도 했다. 어른인 우리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이런 인간과 우주의 탄생원리에 대해 배우지 않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은 '바둑아, 나하고 놀자'가 아닌가?

그 즈음 아이들이 부모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부생아신!"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 뜻을 이해하고 말을 듣곤 했다. 서당이 해체된 뒤에도 2대 훈장인 황선진 선생님을 중심으로 교육문제 연구를 계속했다. 몇 년 후 황선진 선생님은 마리서당의 이름을 이어받아 '마리학교'란 대안중학교를 만들었다. 나리와 새별이는 마리서당 출신으로 다시 마리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주말 농사체험은 아주 좋은 정신건강 청량제

장난꾸러기 온달이.
장난꾸러기 온달이.이광구
농촌에 살면서 동물도 키우게 됐다. 줄곧 개와 고양이를 키웠다. 도시에서만 큰 나는 한번도 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낯설었는데, 아이들은 개와 고양이를 무척 좋아했다. 특히 고양이는 방에서 같이 자기도 하고 한 식구처럼 놀았다.

이름도 재밌게들 지었다. 털이 알록달록한 '다롱이', 온 몸이 까만 '까미' 등. 특히 다롱이는 야생고양이 새끼였는데, 그동안 키운 여럿 고양이 가운데 가장 생기가 넘치는 놈이었다. 온달이랑 장난치는 걸 좋아했다. 그런데 온달이가 장난을 심하게 치면 손등을 할퀴곤 했다. 그 때 온달이 손등은 늘 고양이 상처투성이였다.

나는 닭과 오리를 키웠다. 음식찌꺼기를 주고 달걀을 먹었다. 항생제를 전혀 주지 않은 안전한 달걀인 셈이다. 물론 손님이 찾아오면 닭과 오리도 가끔 잡아먹었다.

농촌에 살다 보니 당연히 논과 밭에서 일할 기회가 많다. 도시에서 정신노동을 하는 내게 주말 농사체험은 아주 좋은 청량제다. 옆집 감자밭 일을 도와주는데, 생각보다 벌레가 많았다. 팔 게 아니라 농약을 주지 않은 밭이기 때문이다. 그걸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닭들이 먹으면 참 좋을 텐데….'

그런데 갑자기 아주 큼직한 놈이 내게 확 덤벼드는 게 아닌가.

'어이쿠!'

오라, 땅강아지로구나.

당시 6살인 막내 보리가 가장 자신있게 부른 노래가 '씨감자'란 노래다. 이원수 선생님 시에 백창우씨가 곡을 지은 노래다. 아주 짧고 단순한 시다. 곡조도 복잡하지 않다.

'씨감자'

감자씨는 묵은 감자
칼로 썰어 심는다.
토막토막 자른 자리
재를 묻혀 심는다.

밭 가득 심고 나면
날 저물어 달밤
감자는 아픈 몸
흙을 덮고 자네

오다가 돌아보면
훤한 밭골에
달빛이 내려와서
입맞춰 주고 있네


감자를 잘라 재를 묻혀 심어본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보리는 그 기억이 있다. 감자를 캐본 적도 있고, 집 가까이서 감자를 자주 본다. 감자 심는 과정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노래다. '감자는 아픈 몸 흙을 덮고 자네'란 대목은 이원수 선생님의 정말 아름다운 발상이다.

허물없이 잘 노는 우리 아이들

늙으신 어머니는 늘 내게 도시로 이사 나오라고 한다. 애들 교육 때문에 어떻게 농촌에 사냐고 걱정이다. 그러나 나는 대학 이후 과정은 아직 모르지만 지금까지 10년 동안은 세 아이들이 잘 자랐다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건 아이들이 그 누구와도 허물없이 잘 사귄다. 또 생각하는 힘도 세다. 나리가 마리(중)학교 때 쓴 국어과 졸업논문은 무려 36쪽이나 된다. 중3 수준에서 그 정도 분량을 소화해 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힘이다. 또 자기 학습계획을 스스로 세울 줄 안다.

온달이는 학습학원을 전혀 다니지 않고도 강화중학교에서 1등을 한다.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잘 들였다. 영종도 과학고등학교에서 하는 인천영재학교 프로그램도 다니고 있다.

공부에 재능이 부족한 막내 보리는 이웃 동생들과 잘 어울리고, 도자기공예·비즈공예 등을 열심히 배운다. 다들 자기 개성에 맞게 자라고 있다.

돈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돈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지는 않았다. 그런 면에서도 나는 강화 농촌으로 이사온 걸 잘했다고 생각한다. 지난 10년 동안 만약 우리가족이 도시에서 살았다면 아이들이 돈 때문에 주눅 드는 일이 많았을 것이다. 아파트 화장실 개수·자동차 종류·옷·컴퓨터 등 돈으로 비교되는 일이 많은 게 도시생활이다.

재무설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개별조건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각자의 개성에 맞아야 한다. 그 개성을 살리면서 독특한 품격을 갖춰나가는 게 교육이다. 인간이 만든 가장 훌륭한 '명품'인 자녀, 그 자녀교육은 꼭 돈으로만 이뤄질 문제는 아니다. 돈이 많으면 선택의 폭이 더 넓어질 수는 있다. 그러나 정반대일 수도 있다. 돈으로 해결하려다 보면 철학적 깊이가 부족해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큰 딸 나리는 제천간디학교 5학년(고2), 큰 아들 온달이는 강화중학교 2학년, 막내 보리는 강화초등학교 6학년입니다.

덧붙이는 글 큰 딸 나리는 제천간디학교 5학년(고2), 큰 아들 온달이는 강화중학교 2학년, 막내 보리는 강화초등학교 6학년입니다.
#자녀교육 #피아노 학원 #농촌체험 #공동육아 #대안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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