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원 목사의 박사 학위 논문은 번역서에 가까웠다. 중간 중간 짜깁기한 부분을 제외하고 거의 똑같이 번역해서 실은 부분만 전체 225쪽 중에 33쪽에 달했다. 왼쪽이 양승원 목사의 박사 학위 논문, 오른쪽은 박용규 교수가 쓴 책 <평양대부흥운동>.박지호
미국 버지니아주에 있는 버지니아한인침례교회 담임 양승원(49) 목사는 2002년 미국 서던뱁티스트신학교(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 '1901~1910년 부흥운동이 한국 기독교 발달에 미친 영향(THE INFLUENCE OF THE REVIVAL MOVEMENT OF 1901~1910 ON THE DEVELOPMENT OF KOREAN CHRISTIANITY)'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제출해 2003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이 논문은 박용규 한국총신대 교수가 2000년에 쓴 <평양대부흥운동>을 상당 부분 베낀 것으로 드러났다. 100년 전 회개와 각성을 불러일으킨 평양대부흥이 한국 교회에 회개할 거리를 하나 더 제공한 셈이다.
당사자인 양승원 목사는 처음에는 "이게 기사거리나 되냐"고 반문했다가, 기자와 몇 차례 전화 통화를 하고 직접 만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절감하고 태도를 바꿨다.
하지만 논문 표절이라는 행위의 심각성보다는 이 문제가 외부에 알려져 개인의 명예 손상, 학교 당국의 조처, 교회에서 발생할 어려움 등에 관심이 더 많은 것으로 보였다.
원산대부흥과 평양대부흥 부분은 사실상 번역
양 목사의 박사 학위 논문은 독창적인 논문이라기보다는 번역서에 가까웠다. 중간 중간 짜깁기한 부분을 제외하고 그대로 번역해서 실은 부분만 전체 225쪽 중 33쪽에 달했다.
특히 논문의 핵심에 해당하는 원산부흥회나 평양부흥회에 관한 내용은 거의 대부분이 박 교수의 책과 일치했다. 일부분만 비교해보자.
"Hardie succeeded in bringing the flame of the Revival Movement from Wonsan through Geasung to Seoul in the spring of 1904. In Gaesung, where the spiritual awakening movement rose in the early part of 1903, the movement was getting powerful, and Bible studies and prayer meetings were prevalent. After the revival meeting the blessed people went back to their families and friends. They gave the message of salvation to them. After the meeting, the spiritual awakening movement continued rising in Gaesung, and it infused power into the churches." (양승원 목사, 박사 학위 논문 64쪽 두 번째 단락)
"이렇게 해서 1904년 봄, 하디는 부흥의 불을 원산에서 개성과 서울로 가지고 오는 데 성공했다. 이미 1903년 초에 영적인 각성의 움직임이 일어났던 개성에서는 하디의 부흥회로 영적 각성이 진작되어 말씀 공부와 기도 열기가 더욱 강해졌다. 그와 함께 부흥운동 이후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자기 가정과 친구들에게로 돌아가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 후 개성에서는 영적 각성의 움직임이 계속해서 일어났고 그것은 교회에 적지 않은 활력을 불어넣었다."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 67쪽 두 번째 단락)
인용문을 제대로 표시하지 않은 부분도 있다. 위의 글에서 마지막 문장은 박 교수의 책에는 인용문으로 되어 있지만, 양 목사의 논문에는 인용 표시가 없어 마치 자신이 독창적으로 쓴 것처럼 되어 있다. 베끼는 과정에서 실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부분은 또 있다. 양 목사의 논문 75페이지 첫째 단락의 마지막 문장도 박 교수의 책에는 인용문으로 되어 있지만, 양 목사의 논문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남의 의견도 번역해 자기 논문으로
박 교수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놓은 부분을 양 목사는 그대로 번역해서 옮기기도 했다.
"Missionaries believed that in this kind of political crisis the way to help this country was only to evangelize, and Korean Christians who had the Holy Spirit should do the work first. So they prayed earnestly every day that God would guide Korean Christians to tell the Gospel to their folks directly. First of all, they educated the Korean church that to believe in jesus necessitates spreading that good news to others." (논문 71쪽 첫 번째 문단)
"이와 같은 정치적인 위기 속에서 이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길은 복음화뿐이며 이 일은 일차적으로 성령 충만한 한국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진행되어야 할 몫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이들은 매일 하나님께서 한국의 형제·자매들을 인도하셔서 그들이 바로 자기 형제·자매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복음에 빚진 자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한국 교회에 분명히 일깨워 주었다."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 79쪽 세 번째 단락)
박 교수가 기술한 내용을 그대로 도용한 곳은 또 있다. 글에 나오는 숫자까지 일치했다. 다만 박 교수의 책에는 참석자가 70명이라고 되어 있지만, 양 목사의 논문에는 'seventh'(일곱 번째)로 기록되어 있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seventy'를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Even though only seventh people attended on the average, the eagerness of the people who attended was amazing. Thirty-eight of them walked there from 5miles, 10miles, 20miles, or even 35miles. some came carrying babies on their backs and lugging food on their hands. others came over the hills, mountains, through rivers and along unpaved, rough roads." (논문 72쪽 세 번째 단락)
"비록 매일 평균 70명이 참석해 수적으로는 규모가 크지 않았지만, 참석자들의 열심은 대단했다. 그 중 38명이 5마일, 10마일, 20마일, 심지어 35마일을 걸어 왔고, 그리고 몇 사람은 아이를 등에 업고 사경회 기간 동안 먹을 양식을 머리에 이고 수많은 고개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포장되지 않은 시골의 거친 길을 따라왔다."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 82쪽 두 번째 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