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문익환 목사와 함께 한 임옥상 미술가. 암울한 현대사를 보여주는 사진이다.임옥상 제공
늦봄 시비 제작을 맡은 미술가 임옥상 대표(임옥상 미술연구소)에게도 그렇다. 1980년대에는 전투적인 민중 미술가로, 90년대 이후 "하늘과 땅이 모두 내 캔버스"라며 미술과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실천하는 예술가로 잘 알려진 임 대표. 지난 22일 서울 평창동에 있는 작업실에서 '늦봄'과 '6월'을 주제로 임 대표와 만났다.
- 시비 제작을 맡은 동기는?
"내가 해야 된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던 것 같다(웃음).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89년도에 목사님 방북 그림을 그렸는데, 그렇게 나한테 감동을 준 인물은 처음이었다. 굉장히 신선하고 아주 멋진 일 아니었나. 불가능해 보이는 행동을 옮긴 것이니까. 어디 감히 평양을…. 사회 전체를 뒤집어놓을 사건이었다. 이번 시비 제작도 나에게는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잠깐 임옥상 대표의 '하나됨을 위하여'를 소개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이쪽일까, 저쪽일까. 하여튼 두루마기를 입은 문 목사가 막 철조망을 넘으려는 순간이다. 철조망 앞에는 진달래들이 피어 있다. 임 대표에게 당시 작품 구상 과정을 물었다.
"김용택 시인과 회문산을 함께 등산한 적이 있다. 산을 오르다가 길을 가로막은 철조망과 만났다. '여기 철조망을 왜 쳐놨지?'하고 그냥 넘어 올라갔다. 그리고 김 시인에게 문익환 목사 방북을 작업할 것이라고 말했다. '멋있는 생각이야'라고 하다, 갑자기 '진달래도 함께 그려주면 안 되겠냐'고 부탁하더라. 그러더니 '이렇게 지천으로 핀 진달래를 보며 좀 느껴지는 것 없냐'고 묻는 거다.
정말 만발한 진달래를 보면서 '많이 피었구만, 뭐'라고 답하니까, '진달래는 말야. 응달에만 피는겨'라네? 진짜 양지에는 얼마 없고, 대부분이 응달에 밀집해 있었다. '불쌍한 사람들은 죽어서도 음지에서 피는데…. 음지에 아무 것도 없으면 얼마나 어둡고 추워 보이겠냐'.
'고맙다'고 하고 내려오는데, 또 이 놈의 철조망이 있는 거다. 팔짝 뛰어 넘는 순간, '맞아, 문 목사님이 평양에 간 것도 이렇게 분단을 팔짝 뛰어 넘은 것 아니냐. 어떻게 보면 간단한 거다. 분단이란 게 생각만 바꾸면 되는 것 아니냐. 우리들이 그런 생각을 가져야 통일도 더 쉬워지는 것 아닐까'는 생각이 팍 들더라. 그래서 사뿐히, 춤추듯이 넘는 장면을 그리게 된 것이다."
- 그리고 목사님과 만난 적이 있나?
"1991년에 호암 갤러리에서 <중앙일보> 주최로 초대전을 했다. 민중미술작가에게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때 목사님 그림을 전시하려고 했는데, 못 걸게 하더라. 그림까지 가져갔는데…. 아주 기분 나빴다. 목사님께 '죄송합니다, 못 걸게 됐습니다' 그랬더니, '괜찮아, 괜찮아. 그렸으면 됐지, 뭐"라고 말씀해 주시더라. 목사님의 씁쓸한 미소를 잊을 수 없다."
- 목사님은 작품을 보고 뭐라고 말씀하시던가.
"아주 좋아하셨다. 작품 설명을 들으신 목사님께서 '맞아, 나도 그렇게 가볍게 생각해'라고 말씀하시더라."
"늦봄 시의 핵심은 경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