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껍질을 위로 한다> 시집 표지도서출판 해암
시와 삶이 둘이 아니고 하나(不而二元論)
핍진한 삶이 시가 되고, 곤곤한 시가 삶일 수 없다. 거울 속에 나타나는 실체와 허상처럼 시에 삶이 투영되지만, 그 실상은 사실 허상이다. 언어의 공감에서 독자가 시에서 향유하는 것은 불확실한 세계의 미증유와 같다. 현대시의 곤경은, 사실 시인의 삶과 밀착되지 않는 간극에서 온다.
“아직까지 들려지지 않은 것은 들려지게 되며, 아직까지 사유되지 않은 것은 알려지게 된다”라고, 둘이 아니고 하나 (不而二元論) 즉 유신론적(有神論的 一元論) 높은 지식은 곧 하나라고 우파니샤드는 말한다.
실천문학의 사조가 퇴색하는 현시대에서 시인의 시와 삶을 별개로 보고, 또 삶이 시고 시가 삶일 수 없는, 유클리드의 평행선처럼 꿈과 현실 또한 어느 순간 합일하는 희열을 꿈꾸지만, 여전히 이 시대 시인의 삶은, 시와 별개의 세계에 속한다.
따라서 시는 있어도, 진정한 시인은 없다고 통탄하는 시대. 진정한 실천문학이 그리운 시인의 몸을 통한 시화가 부족한 시대에, 김두기 시인의 핍진한 삶이, 바로 시편 속에 육화된 삶과 동일선상에 놓여 있다. 그것은 한 그루의 나무에 사는 두 마리 새가 종국에 하나가 되는 우파니샤드처럼 서늘하다.
쓰레기더미에 핀 詩의 우담발화
각 가정과 공장, 건물에서 쏟아져 나오는 쓰레기 수거의 현장에서 오물을 뒤집어쓰고, 몸에 배인 악취가 아무리 씻어도 씻겨나가지 않는 미화원이 시인의 직업이다.
시인이기 전에 미화원인 그는, 모두가 잠든 미명의 안개가 깔리는 새벽거리에 빗자루를 들고 나와 새벽을 연다. 널브러진 휴지와 담배꽁초, 취객의 토사물과 흩어진 광고전단지 등이 어지러운 지난밤의 흔적과 얼룩을 깨끗이 빗질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어둠은 두껍게 벽을 높여 간다/ 소란스럽게 손발 놀리던 삶의 조각들이/(중략)단단하기만 하던 벽에 흔적이 묻어난다./ 어둠을 이젠 벽에다 걸어 놓고/ 물걸레로 닦아야 하는 것임을 알겠다.(새벽2시)” , “산다는 건 말이야/ 무거운 거야/ 그래서 난 너무 많은 것들을/하나 둘 가볍게 하기 다이어트 하는 중이야.(갈대)” 등 총 80여 편의 시편을 묶은 <새벽의 껍질을 위로 한다>(도서출판 해암) 시집은 이처럼 독자에게 들려주는, 초산을 흘리는 메시지.
이는 삶의 밑바닥에 내려와서 체험을 근간으로 형상화된 실천문학의 성취로 평가된다. 시의 한없이 높은 정신은 곧 삶의 어두운 밑바닥에서 솟구치는 샘물과 상통하고, 그 괄목(刮目)은 의의롭다.
곤곤한 일상과 고결한 정신의 은유隱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