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기
산은 세속을 여의지 않건만
속리. 속세를 떠난다는 것. 속세를 떠나든 속세를 벗어나든 세상을 멀리한다는 것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언제든지, 마음 내키기만 하면 복잡한 세상사를 훌훌 털어버린 채 풍진세상을 떠나는 것이 가능하다면 굳이 공간을 세간과 출세로 구분할 필요도 없으리라.
나는 오늘 속리를 결심한다. 어젯밤 잠결에 청산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자신의 숲안에 이미 수십 만 아니 수백 만의 중생이 와서 떼메가고도 남을 울울창창창한 그늘을 만들어 놓았으니 어서 와 쉬라는 얘기를 꿈결처럼 들었던 것이다. 해야 할 일이야 어디 한두 가지 뿐이겠는가마는 쌓이고 쌓인 마음 속 먼지 닦는 일보다 더 급한 일이 어디 있다고 오랫만의 탈속을 망설이겠는가.
옥천을 지나자 금세 말티재(해발 850m)에 닿는다. 차는 터덕거리면서 굽이굽이 재를 올라간다. 올려다 보면 숨가쁘고 내려다 보면 아찔한 곡선의 고개이다. 때로는 직선보다 곡선이 더 무서울 수도 있구나. 내 중얼거림을 말티재가 알아듣고 속세를 떠나는 일이 그리 쉬운 줄 알았더냐고 핀잔을 준다. 신라 때 사람 최치원의 시 한 수가 떠오른다.
도불원인인원도(道不遠人人遠道)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진리를 멀리하려 하고
산비이속속리산(山非離俗俗離山)
산은 세속을 여의지 않았는데 세속이 산을 여의려 하는구나
말티재여, 너는 일부러 세속을 멀리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너를 멀리했을 뿐이라고 말하지 마라. 네 몸이 이렇게 높고 험하니 사람들이 어찌 너를 여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정이품송 옆을 지나다 잠시 차에서 내려 지난 십년 간 이 소나무의 이력을 살펴본다. 옛 풍모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가지가 많이 상했다. 애써 정이품송을 위무한다, 정이품송이여, 그까짓 상처에 주눅들지 마라. 상처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백년도 살지 못하는 사인간들의 일이지, 천년을 사는 네가 어찌 샛바람 따위에 울고 웃겠느냐.
매표소를 지나 일주문을 향해 걸어간다. 절로 가는 진입로가 꽤 길다. 계룡산 갑사만 오리숲이 아니라 속리산 법주사 들머리도 오리숲이다. 절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길수록 마음도 따라서 그윽해진다. 말발도리꽃 몇 송이가 길섶에까지 나와 길손을 반긴다. 범의귀과에 속하는 하얀 꽃이다. 속리말발도리라는 별칭도 있는 걸 보면 이곳이 고향인 나무인가?
저만치 스님 두 분이 걸어가고 있다. 도반이란 함께 길을 걷는 짝이다. 다들 초등학교 운동회 때 겪어봐서 아는 일이지만 2인3각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다리 하나를 줄인 빈 곳에 허약한 마음 하나를 놓아야 하는 경기다. 도반이란 그렇게 인생이란 경기를 2인3각으로 묶어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다. 삶이 힘들 때마다 날 가장 부럽게 했던 말이 도반이란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