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1월, 카투만두 공항에서 한국으로 출국하는 네팔의 예비 산업연수생들아시아인권문화연대
남편을 잃고 한 1년쯤 지났을까요?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차라리 밤새 죽었으면 좋겠다며 잠이 들어도 아침이면 눈을 뜨고 숨을 쉬고 있더군요. 그제야 아이들도 눈에 들어오고…. '어차피 죽을 수 없다면, 애들하고 살아야 한다면, 그래 열심히 살자'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에서 일하다 남편처럼 심장마비로 죽었다던 사람들도 다 보상금을 받았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A사장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 보상금을 받을 수 없다면 이유가 뭔지 그것만이라도 알려달라고 하고 싶었습니다.
무척 힘들게 A사장을 만났습니다. A사장은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것이니 보상금을 많이 받기는 힘들 거고, 관리회사에서 얼마간 돈을 받을 수 있을 테니 서류를 만들어 한국으로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서류 작성해서 보내고 한국에 연락해 보니, 서류 잘 받아서 처리하고 있으니 기다리라고 했어요.
한참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어요. 몇 달이 지났는지 모르겠는데, 그 A사장이 또 네팔에 왔다는 소식이 있기에 또 쫓아갔어요. 이번에는 아들을 데리고 갔어요.
A사장은 조금 있으면 122만루피(약 1800만원)를 받게 될테니 기다리라고 하면서 기회가 되면 아들을 도와주겠다고도 말했어요. 제게는 그 돈을 받으면 자식들 공부 잘 시키고 아껴써서 집 단장 예쁘게 하고 잘 살라는 말도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이제는 살았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그 사기꾼 같은 놈이 2년이 넘도록 돈을 안 보내주더군요. 꼭 자기가 우리 식구들 먹여살릴 것처럼 '아들이 어쨌네, 집을 잘 꾸며야 되네' 하는 소리를 왜 하느냐구요. 그 뒤로는 소식이 끊기고 A사장이라는 사람과 연락도 안 됩니다.
마흔 넘은 과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한참 뒤에 어느 날이던가, 한국의 인권단체에 계신다는 어떤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 분께 우리 사정을 이야기하고 도와달라고 부탁했어요. 그 후에 그분이 일하는 단체를 통해 서류를 몇 장 받기는 했는데, 온통 한국어로 되어 있으니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고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에요.
다른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냥 처음부터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고, 그렇게 얘기했더라면 지금 우리 식구들도 이렇게 마음이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겁니다. 받을 수 있다고, 정확한 금액까지 말해주었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아무 소식이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애들이 장학금 받으며 공부하고 있으니 당장 학비는 그렇다 쳐도, 제가 끝까지 자식들 공부시키고 결혼까지 시킬 수 있을지 자꾸 자신이 없어져요. 우리 네팔에서 마흔이 넘은 과부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뭘 하자고 들어도 당장 돈 한 푼이 없는데요….
* 2006년 11월, 고 비렌드라 비끄럼 사아씨의 유가족은 위에 언급된 인권단체의 도움으로 보상금을 받았습니다.
| | '현대판 노예' 산업연수제, 고용허가제로 바뀌었지만 | | | | '외국인산업기술연수제도'를 부르는 줄임말이다. 본래 의미는 이름 그대로 저개발국의 인력을 국내에 초청하여 산업기술을 전수해준다는 것이나, 실제로는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는 데 활용되었다.
연수생들은 실제로는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였으나 그 신분을 '연수생', 즉 학생으로 강요당하며 기본적인 법의 보호조차 받지 못한 채 고통받아 왔다.
1995년 연수생보호지침이 만들어져 폭행 및 강제근로 금지·최저임금 보장·산업재해보상보험·의료보험 등 일부 권리 보호를 받게 되었으나, 이후로도 근본적인 모순은 사라지지 않았다.
'현대판 노예제'라는 원색적인 비판 속에서도 산업연수제도는 많은 이주노동자들에게 '코리안 드림'을 향해 가는 통로 역할을 해왔다.
산업연수생들은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엄청난 송출비용을 브로커에게 지불하고 입국했으나, 막상 대한민국에 입국해서는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과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된 차별과 인권침해를 감내해야 했다.
1994년 11개국에서 2만여 명을 도입하며 시작된 연수제도는, 2004년 15개국에서 14만 5000여 명을 도입하는 규모로 확대되었으나, 2007년 외국인력제도가 고용허가제로 일원화됨에 따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고용허가제 또한 이주노동자의 노동권을 충분히 보장한다고 볼 수 없으므로, 앞으로도 제도를 개선하고 이주노동자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 | | | |
덧붙이는 글 | * 2006년 7월 23일에서 10월 5일까지 총 열두 가족의 인터뷰가 진행되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묶은 작은 책 <꿈 그리고 악몽>이 지난 겨울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중 여덟 가족의 이야기를 오마이뉴스를 통해 나누고자 합니다.
아시아인권문화연대에서는 사망자 가족 지원을 위한 후원과 연대의 손길을 기다립니다. 소중히 모아주신 정성은 사망자 가족의 생계를 돕고 자녀를 교육하는 일에 쓰입니다. 후원계좌: 국민은행 665901-01-326055 이란주(아시아인권문화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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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 같은 놈의 한국인 사장은 2년 동안 보상금을 주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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