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항쟁이 한창이던 80년 5월 23일자 <조선일보> 7면. '폐허같은 광주... 데모 6일째'라는 제목으로 과격한 시위대에 의해 광주가 폐허가 된 것처럼 보도했다.<조선일보> PDF
나는 한손엔 빵, 또 한 손엔 사이다를 들었다. 순간의 두려움은 사라졌다. 빵과 사이다를 맛있게 먹고 있을 때, 아줌마와 아저씨들은 '고무다라이'와 라면상자에 주먹밥과 김치·빵·음료수 등 먹을 것들을 가져와 버스에 실어주었고, 버스에 탄 사람들은 웃으며 그것을 나누어 먹었다.
어린 내게는 충격이었다. 소보로빵과 사이다는 어머니께 사달라고 졸라야 먹을 수 있는 맛난 것이었다. 특히 소보로빵은 제과점에서 돈을 내지 않으면 절대 공짜로는 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
왜 이 사람들은 어떤 대가도 없는데 이 빵을 나눠주었던 것일까?
의문은 곧 멈추었고 난 빵을 맛있게 먹고, 집으로 돌아와 오후를 보냈다. 저녁에 퇴근하신 아버지와 어머니 대화 속에서 학교에 가지 못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부모님은 "어떤 장군이 광주를 탱크로 둘러싸고 많은 사람들과 대학생들을 잡아가고 있다, 그래서 현재 광주에는 갈 수도 없고 올 수도 없는 형편이며 전남 각지의 많은 사람들이 광주시민을 돕기 위해 버스와 차량을 타고 떠났다. 오늘도 버스 수십 대가 광주로 향했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조용히 주고 받으셨다. 순간 점심에 봤던 풍경이 생각났다.
부모님이 학교로 돌아간다는 형을 왜 크게 야단쳤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 후 어머니는 혹시 군인들이 형을 잡으러 올지 모르니 낯선 사람이 형을 찾거든 모른다고 말하라 신신당부를 하셨다. 그렇게 오월의 그 낯선 하루는 지나가고 있었다.
버스 수십 대가 광주로 향했다
다음날도 학교에 가지 않았다. 목포역에 가고 싶은 마음에 어머니가 외출하시기만을 기다렸다. 어머니가 시장에 가시자 난 또 목포역을 향해 달렸다.
봄날 눈부신 햇살 속에서 난 낯설지만 흥미로운 풍경을 구경했다. 어제보다는 좀 더 여유 있게 교육청 앞 육교위에서 목포역전 버스정류장을 바라보니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삼삼오오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삼학도 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큰 버스를 손으로 밀며 목포역으로 오고 있었다.
육교에서 내려가 버스 뒤 사람들을 따라 걷다보니 목포전화국 앞 주유소에 도착했고, 어떤 아저씨와 버스를 밀던 아저씨가 시시비비를 가리며 말싸움 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기름을 넣으려면 돈을 내라! 돈을 내지 않으면 기름 한 방울도 주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다른 사람은 "지금이 어느 시국인데 돈타령을 하느냐! 광주와 전라도에 군인들이 쫙 깔려 우리 국민을 적이라 부르며 잡아가고 있다. 이 버스는 광주시민을 도우러 광주에 가야하니 기름을 넣어달라!"고 요구했다.
그 후 몇 차례 실랑이가 오가고 한참 후 주유소 아저씨는 기름을 넣어주었고, 모여 있던 많은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기름을 넣은 그 버스는 시동을 걸고 광주로 향했다.
다시 돌아온 목포역에는 한 아주머니가 버스에 탄 사람들에게 누군가의 행방을 묻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교련복을 입은 고등학생 아들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한 아저씨가 비슷한 학생이 어제 버스를 타고 광주에 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 아주머니는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나는 어제 내게 빵을 주던 그 형 얼굴이 떠올랐다. 혹시 그 형이 아닐까? 그리고 불현듯 집에서 나를 찾고 계실 엄한 어머니 얼굴이 생각나 집을 향해 뛰었다.
지금도 군인들이 날 잡으러 오는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