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92회

등록 2007.05.10 08:24수정 2007.05.10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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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번(辰幡)과 이번(離幡)은 정말 참을성이 많은 인물들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초조해졌다. 좌등이 운중각에 들어간 지 일각이 지나지 않아 삼수검 엽락명이 천천히 운중각 주위를 살피더니 자신들이 몸을 숨기고 있는 오장 밖까지 다가와 지나갔다.

'저 자식… 태감께서 오늘 밤은 움직이지 말고 그냥 있으라 했는데….'


이미 추 태감이 알아듣도록 말을 해놓은 터라 상관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귀찮았다. 더구나 그들의 임무가 경비이다 보니 '우리 여기 있소' 할 수도 없는 일. 일단은 경비를 맡은 인물들에게 눈에 띠지 않는 것이 예의라면 예의였다.

거기까지는 봐줄만했다. 하지만 좌등의 거처로 들어간 모가두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아직 운중각에 머물고 있는 좌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오늘 날밤을 새야 할지 모르겠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지금 그들로서는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운중각에 뛰어들어 설칠 수도 없고, 또한 좌등이 자신의 거처로 돌아간다 해도 모가두가 있는 한 손을 쓰기도 어려웠다. 기회란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시기와 조건을 말한다. 그 시기와 조건이 충족될 때 비로소 기회가 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직 그 시기와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 좌등은 들어간 지 거의 반시진이 되었는데도 나올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들의 생각대로 기회를 기다리다보면 어쩌면 날을 새워할 지도 몰랐다.


그러다 또 한 인물이 운중각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번에는 호조수 곽정흠이다. 그는 비교적 세밀하게 주위를 살폈는데 잠시 자신들이 숨어있는 곳에 시선을 멈추는 바람에 혹시나 자신들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않았나 하는 기우마저 들었다. 허나 곽정흠 역시 그냥 지나쳐 백호각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저 자식들… 태감 어른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나?'


아무리 경비가 주요임무라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곧 삼엄한 황궁 경비에 비하면 사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자 실소가 나왔다. 입장이 바뀐 것뿐이다.

호조수 곽정흠이 지나간 지 일다경 정도 지났을까? 드디어 운중각의 문이 열리며 기다리던 좌등이 나오는가 싶었다. 허나 먼저 모습을 보인 인물은 뜻밖에도 성곤이었다. 그 뒤를 따라 좌등 역시 모습을 보였는데 나와서도 성곤과 꽤 오랜 동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짐작으로는 아마 내일 광나한 철호와 벌이는 숭무지례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멀리서 보기에도 좌등이 뭔가 사정을 하는 것도 같았다. 그들은 청각을 최대한 높였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들로서는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엿듣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오른쪽에서 기척이 들렸다.

'저 자식이… 정말… 왜 왔다 갔다 하는 거야?'

이곳을 지나친지 얼마 안 된 곽정흠이었다. 그는 지나갔던 길을 되돌아온 것 같았는데 영 신경이 거슬렸다. 곽정흠은 그들이 있는 곳을 지나 곧바로 성곤과 좌등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고, 인사를 하는 듯 했다. 성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성곤이 격려하는 듯 좌등의 어깨를 툭툭 다독이더니 좌등과 곽정흠이 성곤을 향해 예를 받으며 주작각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헌데 이게 또 웬일인가? 저 빌어먹을 곽정흠이란 놈이 좌등을 따라 좌등의 거처로 함께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일이 꼬이고 있었다. 시각은 벌써 자시가 지나 축시(丑時)에 접어든 듯한데 저 자식들은 도대체 잘 생각도 안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좌등의 거처에 좌등 말고도 진운청이란 자와 모가두, 그리고 이제는 곽정흠마저 들어가 있으니 지금 좌등을 노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기다리자… 기다려야지….'

그들은 기다림에 익숙한 인물들이었지만 속으로 조바심과 함께 짜증이 울컥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참고 있었다.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밤이 길면 꿈도 많은 법이었다.

-------------

좁은 모옥은 피비린내로 가득 차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역겨운 피비린내가 코에 확 끼쳐오는 바람에 능효봉은 놀라 방안을 살펴보았지만 귀산 노인이 천을 여기저기 감고 벽에 기대어 침상에 앉아있는 것을 보며 내심 안도했다.

그리고는 침상 앞으로 다가갔는데 그것은 귀산 노인의 상세를 살피려는 것보다는 그 바닥에 누워있는 시신을 보고자 함이었다.

어께에 박혀있는 둥근 물체는 팔찌 같았는데 반 이상이나 박혀 있었지만 피는 그리 많이 배어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직접적인 사인은 분명 아니었다. 대신 복부를 관통한 듯한 아랫배에서는 피를 쏟아낸 것으로 보아 그것이 직접적인 사인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아주 특이한 상흔이었다. 상처에 살점이 너덜거리는 것이 마치 톱니가 있는 물체가 들어갔다가 나온 것 같은 상흔이었다. 분명 검이나 도에 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능효봉은 건번의 복부를 살피다가 주위가 모두 굳어있는 것을 발견해 냈다.

"이 자식이 건번인 모양이군."

조급한 마음으로 달려온 사람답지 않게 느긋한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엔 미세하나마 의혹과 놀람의 기색이 스치고 있었다. 이 자를 죽인 무기가 무엇인지 뇌리에 떠오른 모양이었다. 허나 확신을 가진 눈치는 아니었다.

"비천환을 사용하는 놈이니 건번이 맞을 게야… 헌데 네 녀석이?"

일부러 힘들다는 표정과 말투로 문득 대답을 하던 귀산 노인이 말꼬리를 흐리더니 언성을 높였다.

"그런 네 녀석은 저 건번이란 놈이 나를 해하러 올지 이미 알았다는 거야?"

귀산 노인의 추궁에 능효봉이 움찔했다. 역시 눈치 하나는 귀신같은 노인네다. 말 한마디에 그런 사실까지 추측해 내다니….

"그런데도 내가 죽든 말든 모른 척 하다가 이제 시체라도 치우러 온 거냐구!"

"거… 무슨 섭섭한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소질이 그리 무정한 사람 같아 보이오? 그래도 제 딴에는 최선을 다해 달려온 거요."

당화란 계집이 뜸을 들이는 바람에 늦게 알았기도 했지만 다른 여러 가지 말도 들어야 하기에 좀 늦추었고, 또한 오는 도중에 철기문의 인물들이 따라붙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좀 늦은 것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사실 저런 자식 따위에게 어찌 추숙이 당하겠소? 저런 자식 정도는 처리할 수 있어야 추숙다운 것 아니오?"

칭찬인지 비꼬는 건지 알 도리가 없다.

"말이나 뭇 하면 밉지나 않지… 근데 저 녀석은 왜 달고 온 거야?"

능효봉을 뒤따라 들어온 설중행은 귀산 노인과 능효봉의 대화를 들으며 엉거주춤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이미 아는 사이였던가? 더구나 두 사람의 대화로 미루어보아 매우 가까운 사이인 듯 했다. 그렇다면 저번에 왔을 때는 왜 그리 모른 척 했을까? 어쩌면 자신 역시 귀산 노인을 모른척했던 것과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굳이 남들 앞에서 밝힐 이유도 없고 또 밝히기도 싫은 그런 것 말이다.

능효봉이 추숙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사이였음에 틀림없었다. 그것도 그가 알고 있기로 능효봉은 이전에 한 번도 운중보에 들어온 적이 없었으니 상당히 오래된 사이였다.

"그래도 오랜 만에 밥값을 했으니 너무 뭐라 하지 마시오. 이 녀석이 단혁을 처리해 주는 바람에 지금이라도 올 수 있었소."

"단혁을? 제법이로군. 철기문에서 안 거야?"

"빌어먹을 추 태감이 철기문에 흘렸소. 신 태감에게 책임을 모두 뒤집어씌우고 말이오."

"단혁이라면 네놈들과 사생결단 내려 했겠군."

"장로 두 명도 있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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