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천지 절집에 봄 향기 그윽하다

[포토에세이] 봄, 선암사

등록 2007.05.09 11:35수정 2007.05.09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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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계와 선계를 이어준다는 쌍무지개다리 선암사 승선교.
속계와 선계를 이어준다는 쌍무지개다리 선암사 승선교.이철영
'천년고찰'. 천 년이란 얼마나 긴 세월이던가. 고작 몇십 년을 살아 본 중생에겐 그 시간이 너무 무겁다.

산사는 언제나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길의 끝에 있다. 그 길의 끝에서 시작됐을 계곡의 물줄기는 내가 걸어온 시간 속으로 역류하며 종종걸음으로 멀어져 간다. 시간도 물줄기도 붙잡을 수가 없다.


아득하다. 부도밭을 지난다. 득도하거나 득도하지 못한 이들의 표지석. 무덤이건만 죽음의 냄새는 없다. 침묵만이 그들의 염원을 대신하나, 정작은 그것도 아니다. 살아있는 자의 감각 속에 존재할 뿐이다.

승선교에 이른다. 어지러운 세상을 비켜 나와 피안의 세계를 갈구했던 이들에게 이곳은 정말이지 선계였을 것이다. 반원의 무지개는 물속의 다리와 만나 원을 이룬다. 물속에서 출렁이는 다리는 부서지지 않고 견고하다. 눈을 감고 물속에 비친 다리를 건넌다. 흔들리는 물이 나를 흡입한다. 다시 아득하다.

눈을 뜨니 꽃들이 지천이다. 룸비니(藍毘尼 '남비니'로 음역, 불교의 시조 석가가 탄생한 곳) 동산이다. 부처님이 오셔도 낄낄거리며 뛰어다닐 만큼 이곳 산사의 봄은 꽃으로 징글징글하다. 꽃은 식물이 동물을 유혹하는 장치다. 화려한 만큼 동물의 힘을 빌려 더 많이 수태하고 먼 신천지로 떠나갈 수 있다. 동물을 유혹한 꽃만이 살아남았고 동물은 꽃의 교태를 이길 수 없다.

겹벚꽃과 이끼 낀 돌담이 운치를 자아내는 해천당.
겹벚꽃과 이끼 낀 돌담이 운치를 자아내는 해천당.이철영
스님들이 어떻게 견디는지 걱정이다. 이 많은 꽃들 속에서 어찌 욕망을 주체할 수 있단 말인가.

잔인한 봄이다. 도화살이란 말이 있다. 욕정을 간수 할 수 없어 이 남자 저 남자의 품을 옮겨다녀야 한다는 여자의 팔자를 칭한다. 그래서 옛날에도 알 만한 집에선 처자들 바람난다 하여 복숭아나무를 심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토록 강렬한 붉은 복사꽃이 이곳에 있을 줄이야.


수백년 된 하얀 겹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선암사 경내.
수백년 된 하얀 겹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선암사 경내.이철영
무릉도원이 무엇인가. 중국 후한 때 유신, 완조라는 사람 둘이 천태산에 올라 복사나무가 있는 곳에서 여인들과 놀다가 고향생각에 내려와 보니 7년이 지났더랬다. 낮은 돌담 위로 여물어진 돌복숭아 붉은 꽃에 눈이 시리고 스님이 그 밑을 지난다.

아! 그런데 그는 무심히 고개 숙여 지나는구나. 아니 짐짓 외면하며 가는구나. 욕망, 절망, 절제, 해탈이란 단어들이 스님의 뒤를 졸졸 따라간다.


이른 벚꽃, 매화의 시기를 지나 4월의 절집엔 겹벚꽃 천지다. 주먹벚꽃이라고도 부르는 이 꽃무리 아래서 여인들이 웃어댄다. 수면 가득한 춘심이 일렁인다. 햇살은 너무도 따스하고 그녀들은 옆구리에 곧 날개가 돋을 듯 간지러운 표정이다. 까르르 웃어대는 소리에 놀라 눈송이처럼 꽃비가 내린다.

이철영
먼 옛날 옥황상제에게 예쁜 공주가 하나 있었다. 많은 청년들이 그녀를 애타게 사모했건만 공주는 북쪽 먼바다의 사납고 무서운 신(神)만을 사랑했다.

어느 날 그녀는 왕궁을 몰래 도망쳐 나와 바다의 신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에게는 아내가 있었고 실망한 공주는 바다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바다신은 그녀를 가엾게 여겨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고는 자기 아내에게도 독약을 먹여 죽게 한 후 공주 옆에 묻어 주었다. 이때 공주의 무덤에서는 백목련이 피어나고 바다신 아내의 무덤에서는 자목련이 피어났다.

선암사 뒤편 차밭을 거쳐 내려오는 약수.
선암사 뒤편 차밭을 거쳐 내려오는 약수.이철영
백목련으로 피어난 공주의 못 이룬 사랑도 안타깝지만 얼마나 억울했으면 아내는 자목련의 그 애절한 색으로 피었을까. 자목련에 코를 대고 향내를 맡아보니 이루지 못한 공주의 애틋함과 아내의 원한이 물씬 느껴진다. 부유하는 향기를 쫓아 그 여인의 몸을 녹여 만든다는 소설 '향수'의 향기가 이게 아닐까 싶다.

선암사의 명물 '뒤깐'. 절집 중 가장 깊은 해우소다.
선암사의 명물 '뒤깐'. 절집 중 가장 깊은 해우소다.이철영
봄이 어디 이곳에만 왔으련만 흐드러진 영산홍, 자산홍, 철쭉이며, 구석에 예쁘게 숨어 눈길을 기다리는 금낭화, 현호색, 휘영청 늘어져 연못에 가지를 드리운 처진 올벚, 그리고 원통전 문살에 피어 사철 지지 않는 자줏빛 모란까지 꽃들의 포위망을 뚫을 길이 없다. 늙은 기와지붕 아래 이끼 낀 돌담, 옹이진 등걸을 걸머진 오래된 나무들, 숨어 핀 작은 꽃들의 사이를 걸어본다.

시인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 봄은 오는가'라고 물었다. 눈이 녹지 않은 가슴에 영영 봄이 오지 않을 줄 알았다. 나의 빼앗긴 들에 이제야 선암사와 함께 봄이 오는가 보다.

덧붙이는 글 | 전남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에 있는 봄향기 그윽한 선암사에는 지난 4월 22일 다녀왔습니다. 이 기사는 s-oil 사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전남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에 있는 봄향기 그윽한 선암사에는 지난 4월 22일 다녀왔습니다. 이 기사는 s-oil 사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순천 #선암사 #봄꽃 #꽃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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