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개태사지에서 수습한 명문기와.송영대
땅을 살피다 보니 의외의 성과를 얻게 되었다. 바로 명문기와 조각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한자가 쉬운 듯하면서도 무슨 글자인지 알기 힘들었다. 2글자로 보이기도 하고, 3글자로 보이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 후에 이래저래 알아봤는데, 아직 명확한 결론은 내리지 못하였다. 우선 나로선 제일 위의 十자 위에 삐침이 있는 것 같아서 千자가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 삐침이 희미하고, 한 글자로 볼 경우 그 차지하는 칸이 너무 작다는 점이 껄끄럽다.
그 아래의 글자는 불(佛)의 이체자가 확실하다. 사람 인(亻)과 사사 사(厶)자가 합쳐진 형태다. 즉 위의 글씨를 합친다면 천불(千佛)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아래의 글자이다. 언 듯 보면 主자로 보이나, 갓머리(宀)가 있다는 점에서 主로 보기엔 어렵다. 奎의 이체자로 볼 수도 있는데, 그럴싸하기도 하나 부수가 하나 더 많으며, 규(奎)가 별자리 이름이기에 佛자 두에 쓰인다고 보기에는 어색한 면이 있다.
이를 가지고 世定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세상 세(世)자의 이체자로서 앞서 말한 첫 번째와 두 번째 글씨를 합친 것으로 보며, 그 아래의 것을 정할 정(定)자의 이체자로 보는 견해이다. 세정(世定)이란 세간정려(世間靜慮), 혹은 세간정(世間定)이라고도 하는데, 해탈도론(解脫道論)의 선(禪)수행법, 즉 선정(禪定)으로 세간에서 생활하면서 수행하는 관법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체자사전을 살펴보아도 비슷한 이체자는 있으나 딱 부러지게 세정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면이 있다. 그리고 두 번째 글자가 佛자가 확실하다고 본다면 세정이라고 보는 견해가 반드시 옳다고 하기가 힘들다.
아직 공부가 많이 부족해서 이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으나 좀 더 자문을 얻어가고 이체자사전을 찾아보면 머지않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파상문이 시문된 토기편도 발견되었다. 파상문이란 물결무늬를 말하는데, 위의 유물은 구연부의 일부로 추정하며, 가로로 그은 선 사이에 물결무늬 3개가 그려져 있다.
청자편도 여러 점 발견하였는데, 개중에는 저부도 있었다. 그리고 한 청자조각은 그 빛이 아직도 잘 남아 있어서, 이곳에서 고급청자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위의 마을에서도 걸어다니다 보니 백자의 조각이 여러 점 보였다. 조선후기의 것으로 보이는 위의 백자편은 굽이 달린 접시로서 대량 생산의 흔적이 남아있다. 자기 내부의 가운데와 굽 아랫부분에 모래가 묻어 있는데, 이는 비슷한 형태의 백자를 여러 점 포개어 가마에 넣고 굽고, 그 후에 이를 떼어냈기에 그러한 흔적이 남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이러한 백자는 많이 발견되며, 얼마 전에 시굴조사에 참여한 가마터에서는 이런 백자가 대량으로 발견되었었는데, 2∼3층으로 포개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5∼6층이 넘게 포개진 백자도 있었다.
마을의 산에 올라서서 개태사를 바라보니 왠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절은 작아 보이고 논밭만 넓게 펼쳐져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과거의 영광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다행히도 2011년까지 이쪽의 토지를 매입하고, 그때부터 개태사지 발굴복원사업을 시작한다고 하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겠다. 물론 발굴조사가 끝나고 복원을 한다고 할지라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그래도 살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영광을 그런 식으로라도 복원하려는 노력이 있고, 이를 통하여 더욱 후세에게 선인들의 삶의 자취를 더 진하게 느낄 수 있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개태사는 아쉬움이 많은 절이다. 대찰의 위용을 찾을 수 있을지, 그리고 찾는다고 하더라도 과거처럼 부흥할지는 모르는 노릇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문화재에 좀 더 깊은 관심을 두고 과거에 손을 뻗는다면 선인들의 향취를 느끼는 것도 크게 어렵진 않을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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