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지의 한쪽벽면에서 누수를 방지하기 위해 기와 사이를 회벽처리한 것을 볼 수 있다. 고산은 세연정을 비롯한 연지를 조성할 때 이러한 회벽처리를 하고있다.정윤섭
병자호란으로 강화도에 파천
강화도는 무인정권시절 몽고의 침입 때 행궁을 세우고 항전을 하였던 대표적인 섬으로 병자호란 시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播遷)하려 했던 것은 이러한 지리적 여건을 잘 말해준다. 이러한 행궁설에 대한 주장을 설득력 있게 추리할 수 있는 부분은 인조와 각별한 관계를 가지며 전성기를 보냈던 고산이었기에 더욱 가능하다.
광해군이 집권하고 있을 때 고산은 이이첨 일파의 실정을 탄핵하는 상소문인 '병진소'를 올려 결국 집권파에 의해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를 간다. 고산이 8년 동안의 유배생활을 마치게 된 것은 1623년(인조1) 광해군과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였다.
고산은 인조 때에 정치적으로 매우 잘 나간 시기였다. 42세에 이조판서 장유의 추천으로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며, 인조 집권 13년의 7년간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공조정랑, 호조좌랑, 형조정랑, 한성서윤, 예조정랑 등을 지내게 된다. 그러나 재상 강석기 등의 질시로 성산현감에 좌천된 뒤 1635년 고향 해남으로 돌아온다.
고산이 해남에 있던 50살 되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이때 고산은 나라의 위급한 소식을 접하자 향리의 자제와 가졸 등 수백을 이끌고 임금이 파천한 강도(江都)인 강화도로 향한다. 이때 항해 중에 만난 수사(水師)들을 격동하여 군진을 이루게 하는 노력을 그치지 않는데 후일 이때 강화도로 간 일행을 두고 근왕군(勤王軍)이라 부르기도 한다.
<보길도지>에는 고산이 강화도로 진출한 일을 '병자수로근왕(丙子水路勤王)'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는 '병자년(1636년)에 근왕병을 일으켜 물길로 떠났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1638년 4월 26일(인조16년 실록) 고산이 올린 공초문에는 보길도의 상황을 짐작하게 하는 기록이 있다. 공초문은 고산이 강화도에 왔을 때 임금을 문안하지 않고 간 것을 가지고 반대파들이 국문할 것을 요구한 것에 대한 반론이다.
고산은 험난한 파도를 헤치며 안흥진에 도착했는데 강도(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배를 남쪽으로 돌려 내려간다. 고산은 공초문을 통해 보길도에 들어간 것이 병란을 겪은 뒤 마음의 병이 발광한 때문이나 이는 실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한 데서 나온 것이니 어찌 성명(聖明)께서 마땅히 긍휼히 여기어 용서를 해줄 바가 아니겠냐고 말한다.
이어 "소신의 성정이 평생 산수간이나 섬 속에 살면서 쓸데없는 일을 잊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임금님을 생각하는 마음은 비록 밥 먹는 중에도 잊은 적이 없고 고요한 밤에 달이 밝게 뜨면 임금님의 옥용(玉容)이 거기에 계시는가 싶고, 만나 뵈올 수 있을지 마음 졸이며 애타게 기다리곤 하였습니다"라고 하며 임금님을 향한 충정이 가득함을 말하고 있다.
자신의 무고함을 변명하기 위해 약간 오버(?)하고 있는 것처럼도 느껴지지만 어쨌든 병자호란을 겪고 자신들의 가졸 들을 데리고 보길도에 도착한 고산이 스스로에 대한 강구책이자 또 다른 전란에 대비한 나름의 대비책으로 이러한 행궁을 조성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이날의 실록을 보면 고산은 이미 인조와 약속되어 있었던 듯 강화도의 배가 내려오지 않아 곧바로 보길도로 들어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산의 근왕병이 보길도로 바로 들어갔다면 들어가 머물 수 있는 준비가 있었으리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고산은 공초문에서 보길도에 이미 가노(家奴) 몇 호와 다른 사람 10여호가 상주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어 그동안 우연히 보길도를 발견했다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나름대로 보길도에 대한 사전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