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렌 블릭센 박물관 앞 작은 정원에 심어져 있는 커피나무.한두희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스쳐지나간 아프리카의 아픈 역사들
그러나 이 영화장면에는 개인적인 사랑뿐 아니라 당시 식민지 사회상을 보여주는 아프리카의 아픈 역사도 나온다. 두 연인 간의 사랑과 야생의 동물에 눈길을 빼앗기다보니 딱딱한 역사 이야기는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여기를 막아서 저수지를 만들 거야."
"이 물은 몸바사로 가는 겁니다."
"나중에 가도 돼."
"이 물은 몸바사의 것입니다."
카렌이 자신의 농장 근처에 흐르는 냇물을 막아 커피농장의 저수지로 쓰려고 하자 하인인 파란 아든이 하는 말이다. 몸바사는 인도양 연안의 케냐 항구도시이다. 아프리카의 물은 식민지 백인 정착민들의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이곳에서 살아온 아프리카인의 공동재산이라는 뜻이다.
"당신은 참 많은 것을 가졌네요."
"나는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을 돈을 주고 산 것뿐이에요."
"우리는 이 땅에 있는 것을 소유할 자격이 없어요. 우리는 여기의 주인이 아니라 그저 스쳐지나갈 뿐이죠."
"내 키쿠유들이 읽을 줄 알면 좋겠어요."
"난 그들이 작은 영국인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어느 누구에게도 구속되기를 싫어하는 자유로운 영혼인 데니스가 연인인 카렌에게 하는 말이다. 아프리카에 큰 농장을 소유한 카렌이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친 후 선교 사업을 하겠다"고 하자 데니스가 식민지 교육이라며 냉소적으로 반박한다.
카렌이 아프리카를 떠나며 원주민들에게 농사지을 땅을 사주려고 하자 영국 총독부 관리는 "원주민들의 몫은 없다, 영국 왕실의 땅이다"라고 잘라 말한다. 쾌적한 기후에 매료된 영국은 당시 케냐 중앙부의 비옥한 토지 450만 에이커를 아예 백인전용 토지(화이트 하일랜드)로 지정해 아프리카인의 소유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단편적인 영화 속의 대화를 통해서도 당시 오랜 주인인 아프리카인들이 종으로 밀려나고, 외지인인 백인들이 주인행세를 하던 식민지시대의 비뚤어진 사회상을 알 수 있다. 카렌 블릭센이 살던 20세기 초에는 이미 케냐의 주인이었던 키쿠유족이나 마사이족 등 원주민은 농사지을 땅조차 모두 유럽 백인들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일부는 총칼에 의해 강제로, 또 일부는 속임수에 의해 헐값에 대초원은 백인들에게 넘어갔고, 아프리카인들은 그들 농장의 노동자로 전락했다. 땅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순식간에 주인과 종이 바뀐 것이다. 당시는 백인들이 대규모 농토를 소유하고 소와 양 등 목축업과 커피와 차 등 환금작물을 재배하는 농장 경영의 열풍이 불던 제국주의 시대였다.
실제로 지난 1895년 케냐를 보호령으로 삼은 영국은 1904년에는 백인국가 건설을 목표로 1905년까지 대단위의 토지를 점령하고 백인 정착민들을 끌어들였다. 백인들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자는 운동이 바로 1952년 '마우 마우(Mau Mau)' 전쟁으로 알려진 '케냐토지자유군(Kenya Land Freedom Army)'의 투쟁. 데단 키마티를 지도자로 하는 토지자유군의 백인 농장과 총독부 건물에 대한 공격은 케냐 독립운동의 시초가 되었다.
토지자유군의 주력부대는 백인들에게 땅을 빼앗긴 키쿠유 부족들이었다. 키쿠유족은 목축을 주로 하는 마사이족과 달리 농업을 주로 하는 농경부족이었기 때문에 땅은 곧 생명인 셈이었다.
원주민들 사이에 내려오는 케냐의 전설에 따르면 옛날에 신이 세 명의 아들을 불러놓고 창과 활, 괭이 중 하나를 선택하게 했다. 장남은 괭이를 선택해 농경민인 키쿠유족이 되었고, 차남은 창을 골라 유목민인 마사이족이 되었고, 막내는 활을 가져 수렵민인 캄바족이 되었다고 한다.
케냐의 독립투쟁은 바로 빼앗긴 농토를 되찾자는 운동이었다. 호주 멜버른 대학의 역사학 교수인 데이비드 데이는 <정복의 법칙>이란 책에서 "땅을 경작하는 것은 침략자가 땅을 차지하고 사는 수단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며 "침략을 정당화하는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복한 땅을 자기 소유로 하며 기존의 원주민을 쫓아내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남의 땅에서 경작하는 것은 정복자들의 영구적인 이주를 정당화하기 위한 전형적인 논리라는 것이다. 케냐를 남아공과 함께 아예 백인국가로 건설하려던 당시 서구 제국주의의 야욕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제가 1910년 조선을 강제합병한 뒤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것도 사실은 땅 빼앗기였다. 토지조사사업이란 미명 아래 전통적으로 사적 소유 관념이 없어 관청에 신고하지 않은 수많은 토지를 총독부 소유로 빼앗아가거나 일본인 이주민들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유럽 백인들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영국의 백인들이 원주민인 인디언들을 내쫓고 캐나다와 미국을 건설해 백인국가로 만들었고,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원주민인 태즈메니아 부족을 아예 절멸시킨 뒤 백인국가를,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백인들은 남아메리카에서 원주민을 몰아낸 뒤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의 사실상 백인국가를 만들었다.
옛날 호주가 백인 이외의 황인종과 흑인 등 유색인종에 대해 이민을 제한하는 백호주의(白濠主義) 정책을 펼친 것은 호주 백인들의 정복과 이주 역사를 알면 한편의 코미디이다. 원주민을 말살시킨 다음 외부인인 자신들이 주인행세를 하면서 백인 이외에는 이주를 받지 않겠다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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