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후 한미FTA 협상을 반대하며 분신사망한 택시노동자 고 허세욱씨의 노제와 추모제가 서울시내에서 열린 뒤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하관식이 열렸다.오마이뉴스 권우성
굳이 한 사람의 가치를 무게로 따지자면 과연 얼마나 될까. 원래 생김새도 다르고 늙고 병들어 가는 육체의 무게는 다양한 삶들의 흔적만큼이나 천차만별이니, 사람됨의 잣대로 종종 쓰이곤 하는 그 영혼성의 무게로 가늠해 보자.
영화적 상상력은 사람 영혼의 무게를 '21g'이라고 했는데, 이는 미국의 던컨 맥두걸 박사가 1907년 과학 저널에 발표한 '학설'에 근거를 둔다. 맥두걸 박사는 사람이 숨을 거두면 반드시 체중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관찰을 통해 줄어든 체중이 21g이라고 했다.
물론 이 실험은 사람의 영혼도 하나의 물질이라는 가설에서 출발한 것인 만큼, '사람의 가치'를 따지기엔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21g만이라도 다행스럽게 여겨야 할지 모르겠다. 한국 사회에서는 최소한 21g만큼만의 무게감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예의조차 잊어버린 한국 사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며 분신했던 허세욱씨가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길거리에서 사회의 복원을 외친 그의 사회적 죽음에 정작 사회는 무관심할 뿐이다. 세금 내는 주인을 무지하다고 구박하며 맹목적으로 협정을 추진하던 노무현 정부는 온 몸을 불사르며 절규한 한 국민의 외침에 어떠한 가치도 부여하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이 정부는 명분도, 의의도, 더 이상 정부라고 주장할 권리도 없다. 정부가 그의 요구를 외면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느 누구든 정당한 주권 행사를 보장받지 못해 결국 막다른 삶의 퇴로로 걸어들어 갈 수 밖에 없다면, 그 자체가 민주정부의 무능이며, 그 책임은 전적으로 정부의 몫인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고인의 죽음을 단순히 '하나의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그의 전 삶과 분노 앞에 그에 상응하는 진실함으로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대다수 시민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미 뼛속 깊이 새겨진 정치적 소외로 자신의 삶을 더욱더 변두리로 내쫓고, 이 땅에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돈'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끝없이 되뇌는 많은 사람들은 미래를 변명삼아 오늘의 죽음을 쉽게 외면하고 있다.
흔히 자살은 삶이 무의미하다는 일종의 자기고백이라는 얘기를 하곤 하지만, 최소한 고인에게 삶은 전혀 무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삶에는 의미가 있음을,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협박에 버금가는 강제 추진과 협정이 약속하는 암울한 미래는 그에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최후의 위협이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삶에 대한 냉소와 환멸이 아니라, 삶의 가치를 무시하고 삶을 무의미한 일상으로 전락시키려는 사회의 폭력과 억압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 누구도 그의 죽음에 대해 삶에 대한 무책임을 운운할 자격이 없다.
무책임한 것은 그 저항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기만과 냉소에 빠져 있던 한국 사회의 천박한 오늘이다. 정치적 소외와 경제지상주의를 운명인 듯 체념하고,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조차 잊어버린 바로 그 천박성이다.
정치와 경제가 아닌 '정치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