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75회

등록 2007.04.17 08:16수정 2007.04.17 08:16
0
원고료로 응원
철담이 죽기 전까지 운중보는 회에서 좌지우지 해왔다. 십수 년 전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더욱 신빙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자네의 의견이 옳은 듯 하군."


추 태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팔숙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 사이에 어떠한 결속이 되어있든 아니든 간에 팔숙은 분명 존재한다고 봐야한다.

"그렇다면 자네는 팔숙이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아… 괜찮아… 그저 자네가 생각하는 사람들을 말해보라는 것이야."

허나 아무리 추 태감이 별 상관없다고 말을 해도 곽정흠으로서는 함부로 대답하기 어려웠다. 이미 곽정흠도 회의 존재를 알고 있고, 회와 보주 간 불편한 관계임을 눈치 채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 생각 없이 불쑥 거론했다가는 그 당사자는 큰 곤욕을 치를 수도 있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돌팔매에 맞아 죽는 개구리 신세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그치는 추 태감에게 대답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저로서는… 제자 분들과… 좌 총관… 정도입니다. 그 이상은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좌등이 보주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터여서 그를 포함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자라 해서 운중이 모두 믿고 있다는 것인가?"

"……!"


곽정흠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자 추 태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동시에 그는 두 사람을 예리한 눈빛으로 주시했다.

"결국 모른다는 말이군. 그것은 누구나 팔숙이 될 수 있다는 말이고, 한편으로는 자네 두 사람 역시 팔숙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의미하는 것이지… 정말 운중의 속내는 너무 깊어 알아볼 길이 없군."

두 사람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팔숙이란 존재는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누가 팔숙인지 꼭 집어내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이 시선을 내리깔고 가만히 있자 추 태감은 다시 검지와 중지를 가지고 탁자를 톡톡 쳤다. 역시 이제 모든 일을 다 보았다는 뜻.

"바쁠 텐데 나가들 보게."

중의가 그들의 곤란함을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은 추 태감의 눈치를 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나가들 봐. 다만… 오늘부터는 자네들이나 아랫사람들이 나서지 않았으면 좋겠군. 아무래도 분위기가 험악해져서 말이야. 괜히 나섰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손해 아닌가? 그저 어떠한 사건이 일어나도 그저 지켜보는 게 좋을 듯싶네."

무슨 뜻일까? 그들의 임무를 포기하란 말인가? 허나 그들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곤혹스러운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것이 그들의 마음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두 사람은 추 태감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두려운 사람들처럼 서둘러 그 방을 나갔다. 이런 자리에는 오래 있어보았자 자신들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추 태감은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문이 닫히자 고개를 돌려 중의를 바라보았다.

"태감께서는 정녕 이번 기회에…."

정작 입을 연 사람은 중의였다.

"어차피 모두 상의 드리지 않았소이까? 이제 그 때가 된 거지요."

이미 추 태감은 모든 결정을 한 모양이었다. 그는 밖을 향해 불렀다.

"경첩형… 자네도 들어오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기하고 있던 경후가 모습을 보였다.

"자리에 앉아…."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삼재를 바라보았다. 이제 결론을 내야 할 시기였다. 이미 여기에 들어오기 전 대부분 파악하고 있었지만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확인까지 한 마당에 신중을 기한다고 시간을 끌며 기다리는 것은 바보나 할 짓이다.

"천과… 이제 상황을 모두 파악했다고 생각하는데… 더 알아볼 것이 있는가?"

"미심쩍은 부분이 두 가지 있기는 하지만 명확한 대답을 줄 사람은 흉수뿐일 것 같습니다. 더구나 태감 어른께서는 이미 마음을 굳히신 듯 하여…."

대답은 천과가 하고 있었지만 표정이나 태도는 나머지 두 인물 역시 똑같았다. 그것은 삼재 세 사람의 사고와 버릇, 그리고 행동방식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단지 천과만이 세 사람의 결론을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다를 뿐이었다.

"답을 주겠는가?"

------------

"어찌된 일이야?"

상만천은 당황했다. 그의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흑백쌍용은 실수할 아이들이 아니다. 헌데 분명 관 안에 있어야 할 여자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

일접 옆에 서 있는 두 사내의 얼굴은 화석(化石)과 같아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었지만 눈빛만큼은 크게 동요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일은 지금까지 없었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둘 다 삼십대 전후로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매우 특이했다. 안면근육이 굳은 듯 얼굴에 변화가 없는 것은 같았지만 햇볕에 그을렸는지 피부가 검은 사내는 백의를 입고, 한번도 햇볕에 노출하지 않았던 듯 여자보다 흰 피부를 가진 사내는 흑의를 입었다.

"배(船)…."

백의를 입은 사내의 중얼거림은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사투리가 심했다. 아마 남방 사람인 것 같았다. 자신의 눈으로 보면서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뚫어져라 직시하는 관(棺) 내부는 관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비단을 깔아 마치 아늑한 잠자리를 연상시켰다.

허나 그 속에는 기대했던 여자 대신 배에서 갑판을 교체하거나 수리할 때 쓴 것으로 보이는 낡은 목재가 들어있었고, 특이한 것은 자단목(紫檀木)으로 만들어진 목갑 하나가 들어있다는 사실이었다.

헌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 목갑은 분명 운중보주가 진운청을 시켜 함곡에게 갖다 준 바로 그 목갑이었고, 함곡이 그의 부인에게 맡긴 그 목갑이었다. 그것이 어찌하여 이 관속에 들어가 있는 것일까?

상만천이 눈짓을 하자 일접이 조심스레 목갑을 꺼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뚜껑을 열었는데 역시 그 속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미 봉인이 뜯겨나간 것으로 보아 누군가 열어보았음이 분명했다.

"배… 운중선입니다."

백의를 입은 흑룡(黑龍)이 다시 알아듣기 힘든 억양으로 말했다. 그 말 한마디로 상만천은 이런 불상사가 왜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흑백쌍용은 실수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이 시킨 임무를 완수했을 것이다.

"이 관을 너희들의 수중에서 벗어난 것이 운중선이었단 말이지?"

"해룡신(海龍神) 위가(魏家) 놈이 짐은 따로 실어야 한다기에…."

그냥 짐이 아니라 시신을 넣는 관이다. 그것을 선실이나 갑판에 둘 수는 없었을 터였다. 더구나 추산관 태감 일행과 철기문의 문주인 옥청문 일행이 탄 상태였다.

"누군가 빼내갔다는 말이군. 적당한 무게의 쓰다 남은 목재를 넣어두고 말이야…. "

"함곡의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는 배에서 내리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일접이 보고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81분 윤·한 면담 '빈손'...여당 브리핑 때 결국 야유성 탄식 81분 윤·한 면담 '빈손'...여당 브리핑 때 결국 야유성 탄식
  2. 2 민박집에서 이런 이불을 덮게 될 줄이야 민박집에서 이런 이불을 덮게 될 줄이야
  3. 3 나무 500그루 가지치기, 이후 벌어진 끔찍한 일 나무 500그루 가지치기, 이후 벌어진 끔찍한 일
  4. 4 [단독] 명태균 "검찰 조사 삐딱하면 여사 '공적대화' 다 풀어 끝내야지" [단독] 명태균 "검찰 조사 삐딱하면 여사 '공적대화' 다 풀어 끝내야지"
  5. 5 윤석열·오세훈·홍준표·이언주... '명태균 명단' 27명 나왔다 윤석열·오세훈·홍준표·이언주... '명태균 명단' 27명 나왔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