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륵사의 중심법당인 극락보전.백유선
신륵사는 조선시대에는 주로 '보은사'란 이름으로 불리었다. 세종대왕의 영릉이 여주로 옮겨지면서 영릉의 명복을 비는 원찰이 된 후 세종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에서 보은사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원찰이 되었으니 중심 법당의 이름도 대웅전이 아니다.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이 봉안된 극락보전이다. 세종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곁눈질을 좋아해서인지 중앙의 아미타불보다는 그 곁의 작은 탄생불이 눈길을 붙잡는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불교는 탄압을 받았다. 심지어 석가모니를 '석씨'라 표현하고 부처를 '불씨'라고 표현하기도 했었다. 그 탄압이 가장 심했을 때가 세종 때였다. 불교를 탄압했던 세종의 영혼이 결국 부처의 구원을 바라는 처지가 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불교의 수난시대인 조선에서 정작 왕릉에는 수호 사찰들이 지어지고 있었으니 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내가 하면 로맨스요, 다른 사람이 하면 불륜'이라던가? 적절한 비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죽은 뒤의 세상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종교가 하나같이 극락이나 천당 그리고 지옥을 말하고 있다. 불교를 탄압하던 조선의 유학자들은 극락이나 지옥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럼에도 원찰이 세워지고, 나아가 지옥에 빠질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명부전과 같은 전각이 세워졌다.
이를 보면 조선의 유학자들도 사후 세계에 대해서만은 확신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죽은 후의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묻는 제자의 물음에 "내일의 일도 모르는데 죽은 후의 일을 어찌 알겠느냐?"고 대답한 공자의 말을 그들이 가슴으로 받아들였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어쨌거나 영릉의 원찰이 되는 바람에 신륵사는 다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불교 탄압으로 사찰들이 유생들의 유흥장이 되고 승려가 천민취급을 받던 시절이니 신륵사로서는 큰 원군을 만난 셈이다.
명부전의 십대왕을 본 아이가 "누구야?"를 반복한다. "저 분은 염라대왕이야. 나쁜 짓을 한 사람을 지옥으로 데려간단다. 알았지?" 겨우 이 정도가 아이 눈높이에 맞춘 설명의 전부일 수밖에 없다.
뱃사공을 지켜주던 '벽절'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