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오마이뉴스 남소연
문학평론가이자 서울대 명예교수인 백낙청 교수를 찾아가는 길은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함께 차를 타고 가기로 했던 사진기자가 아침부터 교통사고가 났고, 택시를 잡았지만 기사가 파주 출판도시를 모른다고 했다. 하긴 나도 초행길이었다. 다른 택시에 올라 자유로를 거쳐 출판사 창비가 있는 파주 출판도시에 도착했다. 약속시간보다 이른 시각이었다.
2007년 3월 30일 금요일 오전 9시 40분의 일이다. 사실 그날은 서부지법에서 지루하게 진행되고 있는 내 교수지위확인 소송의 본안소송 결심공판이 있던 날이었다. 잊고 있었는데 나는 해직교수인 것이다. 공판은 변호사에게 위임했다. 그날 저녁에는 한 세미나에서 논문을 발표하기로 되어 있었고, 그날 오후에는 한 영화주간지에 쓸 영화평을 쓰기 위해 시사회에도 가야 했다.
이런 분주함이 간혹 생을 공허하게 느끼게 하는 것은 사실인데, 적어도 2007년의 나는 머리가 아닌 몸으로 세상을 사유하기로 결심한 자라는 것을 상기했다. 해직교수의 비애에 빠질 시간도 없이, 나는 내 몸이 만들어낼 사유에 정직하자고 약속했다. 그 약속이 지켜질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비판했던 백낙청, 만나보고 싶었던 까닭
백낙청 교수와의 일정을 잡는 일은 어려웠다. 일단 서로의 일정을 일치시키기 어려웠다. 백 교수는 그는 6ㆍ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데, 3월 초에는 북측과의 회의로 중국에 다녀왔고, 귀국한 이후에는 가벼운 건강상의 이유로 만날 수가 없었다. 전업기자라면 나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스케줄을 앞당겨야 했겠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3월 초에 섭외한 것이 그달 말에야 만남을 이룰 수가 있었다.
백낙청 교수를 만나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가 문학평론가이면서도 오래전부터 한반도의 분단현실에 대한 이론화 작업과 실천 양면에서 매우 중요한 작업을 벌여왔으며, 특히 최근에는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입론을 지식사회에 제출했는가 하면, 이른바 진보논쟁으로 명명되는 논쟁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문학의 유력한 상징이 된 출판사와 잡지 창비의 상징적 존재이면서,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문학평론가였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창비와 얼마간의 애증이 있다면 있는 축에 드는 사람이다. 이른바 '문학권력 논쟁'의 와중에 창비를 '진보 권위주의'로 비판한 바 있으며, 그런 가운데서도 백낙청 교수의 '지혜의 위계질서'라는 개념을 비판한 바가 있다.
그런 내가 백낙청 교수를 인터뷰하는 것은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지만, 한국사회는 어쨌든 편협한 측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소설가 이문열씨를 '좌우지간'에서 만났더니, 언론계의 한 선배는 이명원의 젊음의 독기가 빠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글쎄, 논쟁 상대자가 굳이 서로를 회피할 필요가 있을까. 논쟁은 논쟁대로 치열하되, 서로의 관계에 대해서는 오히려 존중하는 것이 더 성숙한 태도가 아닐까.
노무현 정부의 공과? 보수가 가장 좋아할 구도
백낙청 교수와의 인터뷰는 2시간여에 걸쳐 진행되었다. 장소는 파주에 있는 출판사 창비 4층의 집무실이었고, 오늘의 한반도 상황과 문학계의 상황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인터뷰를 재구성할까도 생각해보았지만, 논의한 내용의 넓은 범위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백낙청 교수의 주장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점에서, 아래에 인터뷰의 전문을 수록하고, 논의의 핵심적인 사항은 별도의 기사로 요약하는 방식을 취하기로 했다.
인터뷰를 정리하고 나니, 백낙청 교수에 대해서 특히 문학권력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반론할 사항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다른 독립적 지면에서 개진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부기하지 않았다. 인터뷰 내용의 경우, 질문은 핵심적인 사항만을 요약했고, 백낙청 교수의 발언은 가감 없이 전문을 게재했다는 점도 알려드린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다.
- 최근에 범여권 대선후보 단일화를 위한 '원탁회의'를 주관하신다는 기사도 보았다. 오늘의 현실 속에서 문학지식인으로서 현실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정국이 요동치고 있는데 이에 대한 고언을 듣고 싶어 선생님을 찾아뵙게 되었다. 아무래도 노무현 정부의 집권 마지막 해이다 보니, 정부의 공과에 대한 평가가 증폭되고 있다. 보수진영은 물론 진보진영 내부에서도 가혹한 평가와 논쟁이 불거져 나오고 있는 형국이다. 여러 인터뷰에서 선생님께서는 노무현 정부를 일거에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그 전 정부와의 관련 아래서의 공과를 논의해야 한다고 하셨다.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 전면적인 부정을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이야기를 내가 한 것은 사실이다. 그 전에 한두 가지 해명을 하고 싶다. 아까 원탁회의를 말씀하셨는데, 그 발상은 개혁세력의 대동단결을 위해서 유력한 정치인들을 시민사회나 종교계에서 초청해 원탁회의를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주동자 또는 참여대상으로 내가 끼어 있다는 것은 완전한 오보이다. 실은 6ㆍ15 남측위원회 대변인실에서 보도자료를 내서, 그동안 신문에 나온 것은 오보이고 나는 6ㆍ15 남측위원회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 한 현실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어떤 모임도 주도하거나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을 언론기관에 돌렸다.
노무현 정권이 실패했느냐 아니냐 하는 점에서, 나는 실패한 것도 많고 무능한 점도 많다고 보지만, 진보논쟁이 그렇게 구도를 갖고가는 것은 잘못된 거라 생각한다. 그것은 보수진영에서 제일 좋아할 만한 구도를 설정해놓고 말려드는 꼴이다. 더 좀 넓은 시각에서 우리사회가 그동안 1987년 이후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그 시기를 분류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다.
노태우 정권을 빼고 민주개혁정부라 보는 것도 있고, 김영삼 정권까지도 빼고 김대중 정부 이래를 개혁세력 또는 민주세력 집권 10년이라 이야기하는 방식, 그리고 노무현 정부만을 따로 논의하는 방식도 있다. 그만큼 1987년 이후 민주화의 과정이 선명치 않고 복잡하다는 것을 뜻한다고 본다. 노태우 정권은 군부출신의 대통령이 집권했기 때문에, 거기까지는 민주화시대에 안 넣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1987년 이후를 민주화가 된 시기라 한다면 엄연히 노태우 정권이 들어가게 된다. 또 실제로 노태우씨가 전두환씨와 같이 쿠데타를 했지만, 집권할 때는 1987년 이후의 민주화된 헌법에 따라 직선제를 통해서 집권했다. 그런 점도 모호한 상태다. 김영삼 정권은 스스로 문민정부라 지칭했듯이 우리 사회의 30년 넘은 군사정권을 청산한 최초의 정부라는 의미가 있다. 다만 민정당과 합친 민자당, 그 후의 신한국당 정권이라는 점에서 민주정권에 완전히 끼긴 그렇지만, 그렇다고 뗄 수도 없는 정권이다. 김대중 정권만 해도 DJP연합에 의해 집권한 정부고.
그래서 그런 복잡한 양상과 큰 그림을 우리가 염두에 두고 그 맥락 속에서 노무현 정부의 어떤 점을 평가하고 비판할 것인가 이렇게 나가야지, 그냥 덜렁 노무현 정권이 실패했다는 것이 맞느냐 틀리냐, 진보가 무능한 것 아니냐 이런 식으로 나가면 논의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 민주화의 역사 속에서 각각의 정권이 갖고 있는 특수성, 민주주의가 복잡한 방식으로 구성되어 간다는 말씀인 것 같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노무현 정부가 갖고 있던 문제점에 대하여는 많은 견해가 제기되고 있는데, 반대로 선생님께서 꼽을 수 있는 노무현 정부의 업적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흔히 말하는 대로 노무현 정부에서 제왕적인 대통령 당 총재는 없어졌다. 정치 선거 같은 것이 비교적 투명해졌다는 점. 이런 것은 당연한 업적으로 꼽아야 한다. 남북관계에서는 서툰 점도 여러 가지 곡절도 있었지만 크게 봐서는 옳은 방향으로 밀고 나갔다. 최근에 이회창씨의 발언을 보면,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그가 집권했다면 어떠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또 과거사 문제가 참 논란이 많지만, 제주 4ㆍ3사건의 경우 대통령이 국가를 대표해서 제주도민에게 사과했다거나, 인혁당 사건이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이 나왔다는 것, 이런 것이야말로 단순히 유족들에게 한정된 문제가 아니고,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의 전진이고 우리 사회가 그만큼 선진화되어가는 증거라고 본다. 나는 그런 것은 인정하면서 문제점을 지적해야 한다고 본다.
기본적인 관점에서 나는 남쪽에서 진행되는 역사건 북쪽에서 진행되는 역사건 한반도를 아우르는 분단체제라는 틀 안에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그동안 해왔다. 그러니까 노무현 정권의 한계 같은 것도 크게는 세계체제 자체가 부과하는 한계가 있고, 한반도의 분단체제의 일익으로서 감내해야 하는 한계가 있고, 또 그런 것을 감안하고도 이것은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지지 않으면 안 될 그런 문제점이 있다는 점을 세심하게 구분해서 논의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최장집·손호철, 분단을 부수적 사실로 본다"
- 말씀을 듣다 보니, 진보진영의 논쟁구도의 설정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과 함께, 특히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관점에 '분단체제'에 대한 의식이 결락되어 있다는 비판도 생각난다. 가령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실패를 영미식의 정당 중심 체제, 프로세스가 확립되지 않은 한국사회의 문제를 든 것에 대해서도 이의제기를 하신 바 있는데.
"상당수의 진보적인 학자들이 어떤 면에서는 보수적인 논객이나 학자보다 분단문제를 외면하는 경향이 더 강한 것 같다. 쉽게 말해서 보수진영에서는 툭 하면 상대방을 친북좌파로 몬다. 그것은 늘 북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분단상황에 자기들 나름으로는 맞춰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보진영에서,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의 학자들은 마치 이 사회가 분단과는 기본적으로는 특별한 관계가 없고, 분단이라는 것이 하나의 부수적인 사실로 있는 것처럼 그런 전제를 깔고, 분단 안 된 사회의 척도로 진보와 보수를 따지는 경향이 많다. 나는 최장집 교수도 그런 예의 하나라고 보고, 손호철 교수도 그런 경향이 강하고, 그런 분들이 많다고 본다.
그런데 분단체제라고 할 때는 그냥 분단을 의식한다는 것이 아니다.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남북 모두가 아주 다른 사회로 발전하면서도, 묘하게 공통성과 상호의존성이 있는 일종의 체계, 적어도 체제 비슷한 구조가 정착이 돼서 알게 모르게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뜻인데. 그런 각도에서 본다면 흔히 NL(민족해방)계라 하는, 민족자주를 중시하고 자주통일을 부르짖는 분들도 분단에 대한 의식은 첨예하지만 분단체제라는 인식은 부족하지 않나. 그래서 요즘 다시 옛날에 쓰던 NL, PD(민중민주)라는 말이 다시 나오는데, PD계열의 흐름을 이어받은 분들은 한국사회의 체제적인 성격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이 체제를 변혁하거나 전환시켜야 된다는 의지는 강한데 분단에 대한 의식은 미약한 것 같고, 이른바 NL계 사람들은 분단에 대한 의식은 첨예한데 이것이 분단체제, 남북을 아우르는 분단체제라는 인식이 부족한 것 같다. 그런 분들은 분단체제라는 용어를 쓰더라도 남쪽의 반공체제라거나 극우 보수체제에 국한해서 쓰는 경향이 있다.
사실은 이것을 처음 지적한 것은 1980년대 말이었다. 6월항쟁 이후에 6월을 보는 세 가지 시각을 이야기했다. 당시의 NL적 시각, PD적 시각, 그리고 중도개혁(BD)의 시각이 각기 지니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면서, 새롭게 분단체제 극복을 위해서 결합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요즘 와서 그런 생각이 절실하고 더러 다른 분들의 입에서도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우선 남북연합부터 해놓고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