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대탄압이 이루어진 '신유박해'로 다산은 강진에 유배되었다.정윤섭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처음 소개된 것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걸친 시기로 보고 있다. 처음에는 주로 명나라에 다녀온 사신이 서양의 자연과학서적과 더불어 천주교에 관한 한역(韓譯) 서적을 얻어왔으며, 천주교는 종교로서보다는 서양학문의 하나로서 이해되어 서학(西學)이라 부르고 있었다. 광해군 때의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마테오리치가 지은 <천주실의>를 소개하며 천주교와 불교의 차이점을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18세기는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생성이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진행될 때였다. 천주교는 18세기 후반 정조 때에 이르러 이익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남인실학자들이 유교의 고경(古經)을 연구하는 가운데 천주(天)를 옛 경전의 하늘과 접합시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때 정약종, 정약용 형제, 권철신, 이벽 등 남인 명사들이 천주교에 입교하였는데, 해남 윤씨가의 인물들이 남인에 속했던 것을 보면 이들과의 교유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윤지충은 당시 진산(珍山) 장고치(현 금산군 벌곡면 도산리)에서 태어나 막현리로 이주해 살던 해남 윤씨가 집안의 인물로 고산 윤선도는 윤지충의 6대조이다.
정약용의 어머니가 해남 윤씨이듯이 해남 윤씨가와의 관계는 상당히 각별하다고 할 수 있는데 정약종과 정약용 형제는 윤지충의 고종 사촌형이었다. 윤지충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바로 정씨 형제들과의 학문 교류의 결과였다. 윤지충은 1787년~1788년 무렵에 세례를 받은 후 그동안 배워 오던 학문 대신 천주교 교리를 실천하는데 열중하였다.
그러던 중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상 제사 금지령을 하달하자 신주를 폐하였고, 다음해 모친이 선종하자 전통 상례(喪禮)를 하지 않고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 사실이 지방의 관장과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신해박해'의 원인이 된 '진산사건'이 되었다.
윤지충은 내외종간인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감동해 믿기로 작정하였으며, 가까이 사는 외사촌 권상연은 윤지충에게서 '천주실의' 등의 교리서를 배우고 천주교에 입교했다. 윤지충이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이를 통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당시 소외된 남인계열 학자들의 교유와 만남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함축하고 있다.
천주교는 교세가 점점 확대 되자 유교식 제사를 무시하는 신도의 행위가 당시의 성리학적 사회질서 속에서는 불효와 패륜으로 비쳐졌기 때문에 국가의 금압을 받게 된다. 이로 인해 1785년(정조9) 천주교는 사교(邪敎)로 규정되고 북경으로부터 서적수입을 금하였으며, 1791년 어머니 제사에 신주를 없앤 윤지충을 사형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남인에 우호적이었던 정조는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써서 큰 탄압은 없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즉위하고 노론벽파가 득세하자 그들과 정치적으로 대립되어 있던 남인시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대규모의 천주교도 탄압이 가해졌다. 1801년(순조 1)의 대 탄압을 '신유사옥'이라 하는데 이때 이승훈, 정약종, 권철신 등 300여명의 신도와 청나라의 신부가 처형되고, 정약용, 정약전 형제가 유배되었다.
정약용 형제는 3형제 중에 정약종이 죽고 정약용, 정약전은 유배를 당해 당시 새로운 학문과 문화에 대한 선진지식을 추구하고자 했던 학자들의 모습을 당시의 시대상황 속에서 느껴볼 수 있다.
선진 문화에 대한 추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