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선생님 댁에서 가져온 대나무를 필자의 집에 옮겨 심었다.김언호
상당히 굵은 동백 한 그루도 옮겨왔다. 40여 년 선생님이 키우던 것인데, 겨울에는 온실에 넣어 보호해야 한다. 대나무도 그렇지만 동백도 선생님의 고결한 사상과 정신을 닮지 않았는가.
이제 나는 선생님이 키우던 보리수도 옮겨오려 한다. 좁은 마당에서 나무가 자꾸 자라면서 집을 덮고 있어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선생님의 큰아드님 함우용 선생이 말씀했다. 선생님이 온실에서 키우던 선인장도 계속 자라 잘라주고 다시 잘라주지만, 그 가꾸는 일이 보통이 아닐 것이다.
자유 없는 시대에 어찌 사상의 발전이 가능한가
첫 전집을 만든 지 벌써 19년이 됐다. 이제 우리는 다시 '새 함석헌전집'을 준비하고 있다. 한 시대의 우뚝 서는 사상가의 저작집은 계속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나는 함석헌 선생님의 사상과 저술이 우리 민족 공동체가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 고전이라고 확신한다. 새롭게 편집하고 있는 <함석헌전집>은 오늘의 젊은이들에게도 충분히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여행할 때 나는 함석헌 선생님의 책을 한 권씩 가져간다. 2월 19일부터 1주일간 프랑스 파리를 다녀오면서는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를 갖고 갔다. 1970년부터 80년까지 <씨알의 소리> 권두에 실린 선생님 글을 모은 것으로 함석헌 사상의 한 절정을 보여준다. <씨알의 소리>가 창간됐다 폐간되고, 법정 투쟁을 통해 복간됐다가 다시 80년 신군부에 의해 폐간되는 10년 동안 선생님의 고뇌와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는 어려운 시대를 성찰하면서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을 격려하는 시편이자 철학적인 단편으로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선생의 고뇌와 열정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언젠가 선생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글에 대한 권력의 감시가 참으로 교묘하고 구조적이라서 사상과 정신이 발전할 수 없다고, 자유 없는 시대에 무슨 사상과 정신이 발전하겠느냐고, 그래서 문장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둔다고. 문장을 다듬는 것이 자기 자신에 의한 또 하나의 사상적 검열 같다고 말이다. 이런 말씀을 떠올리며 선생님의 글을 읽노라면 50, 60년대보다는 70년대 글들이 더 거칠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역으로 더욱 생동한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최근 나는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를 다시 읽기로 했다. 선생님의 성찰을 통해 나는 70년대를 다시 살펴보고 있다.
"흙, 씨알의 바탕인 흙이 무엇입니까? 바위가 부서진 것이다. 바위를 부순 것 누구입니까? 비와 바람입니다. 비와 바람은 폭력으로 바위를 부순 것 아닙니다. 부드러운 손으로 쓸고 쓸어서, 따뜻한 입김으로 불고 불어서 그것을 했습니다. 흙이야말로 평화의 산물입니다. 평화의 산물이기에 거기서 또 평화가 옵니다."
스스로 일군 '씨알농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생명과 자연의 이치와 씨알의 사상을 성찰한 선생님이었다.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는 야간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모산(毛山)에 밤비가 내리고'라는 어린이를 예찬하는 명문을 깊은 밤 비 내리는 모산의 그 공민학교에서 써내시기도 했다.
격동하는 역사를 혼신으로 부대끼면서 써낸 선생님의 글을 읽다 보면 어느새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다. '들사람 얼'이란 불후의 명문에서 선생님은 우리 민족의 힘찬 기상과 살아 움직이는 자태를 노래하고 있다.
"그는 문화를 모른다, 기술을 모른다, 수단을 모른다, 인사를 모른다, 체면 아니 돌아본다. 그는 자연의 사람이든, 기운의 사람이요, 직관의 사람, 시의 사람, 독립독행의 사람이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 사람, 아무것도 듣지 않는 사람, 다만 한 가지 천지에 사무치는 얼의 소리를 들으려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다. 들사람이여, 옵시사! 와서 다 썩어져가는 이 가슴에 싱싱한 숨을 불어넣어 줍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