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 2>. 이 표는 <표 1>을 합리적으로 재조정한 것이다.김종성
<표 1>에 비해 보다 간명해진 <표 2>를 보면, 16세기 후반만 해도 조선해·기타(중국해)의 표현만 사용되었고, 일본해라는 명칭을 사용한 유럽 지도는 전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볼 때에 조선해가 일본해에 비해 유래가 더 깊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해라는 명칭이 전체 410매 중에서 254매로서 62.0%를 차지하고 있지만, 일본해로 표기된 254매의 대부분인 206매가 19세기 때의 것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세기에 갑자기 일본해 표기가 급증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놓고 볼 때, 두 가지 정도의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9세기 초반은 기본적으로 서세동점의 시기였다. 서양세력이 동아시아로 대대적으로 진출한 시기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동아시아에서 서양과 가장 많이 접촉한 나라는 중국이고 그 다음이 일본이었다. 조선의 대(對)서양 접촉은 중국·일본에 비하면 지극히 미미한 편이었다. 일본도 이 당시 조선처럼 쇄국을 하고 있었지만, 일본은 이미 오래 전부터 네덜란드 등과 교류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에 비해 자국의 입장을 홍보할 기회가 더 많았다.
또 19세기 후반은 일본이 서양자본주의를 모방하여 서세동점에 적극 편승하던 시기였다. 1874년 대만 침공 이후의 일본은 사실상 서양국가나 마찬가지였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조선과 일본 중에서 어느 쪽이 서양을 상대로 자국의 입장을 홍보하기가 더 유리했는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본다면, 19세기 유럽 지도에서 일본해 표기가 급증한 것은 조선에 비해 일본이 자국의 입장을 홍보할 기회가 더 많았던 데다가 19세기 후반에는 일본도 아예 서세동점에 편승하여 대외침략에 나섰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이 자국의 입장을 홍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서양의 침탈에 시달리고 있던 그 시기에 일본은 서양 편에 서서 조선·청나라를 침탈하고 있었으며, 그런 기회를 이용하여 일본은 일본해라는 표현을 국제사회에 홍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송의 일방이 병원에 누워 있는 사이에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증거를 제출했다면, 판사로서는 그 일방의 증거 제출도 기다려주는 게 공정한 태도일 것이다. 그런데 이제까지 한국은 그러한 공정한 기회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일본측이 제시한 자료 속에서 일본측의 논리적 약점을 도출할 수 있다. 일본측은 19세기 초반에 일본해라는 명칭이 국제적으로 확립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19세기 초반에 일본해가 확립되었는가를 파악하려면, 기본적으로 18세기 이전까지 축적된 상황을 바탕으로 해야 할 것이다.
국제사회가 19세기 초반에 '일본해가 보편적 명칭인가?' 여부를 판단하려면, 19세기 초반에 눈앞에서 진행되는 상황이 아닌 18세기까지의 상황을 자료로 했을 것이라고 이해하는 게 타당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위의 표를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6세기까지만 해도 일본해라는 명칭을 사용한 유럽 국가는 없었다. 그리고 16~18세기의 표기 실태만 따로 정리하면 <표 3>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