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부조. 위는 화성 제암리 교회의 학살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아래는 유관순의 시위 장면을 묘사한 부조의 일부로 서구형 얼굴로 묘사되었다.백유선
절에서 공원으로
당시의 함성소리를 떠올리며 바로 곁에 있는 비각으로 발길을 옮긴다. 팔각정 뒤의 원각사지10층석탑과 함께 비각 안의 원각사비는 이곳이 본래 절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고려시대 이곳에는 흥복사라는 절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 초 억불정책으로 절은 없어지고 빈 터만 있던 곳에 세조때 다시 절을 세워 원각사라 하였다. 기본적으로 억불정책이 진행되던 시기였지만 왕에 따라 불교를 신봉하기도 하였으니, 일시적으로 탄압이 약화된 결과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성종 이후 억불정책은 다시 강화되었고 결국 연산군 때에 이르러 폐사되고 말았다. 특히 연산군은 이곳에 전국에서 뽑아 올린 기생과 악사들을 관리하는 관청을 두기까지 하였으니 절의 운명이 완전히 달라진 셈이다. 이후 폐사가 된 이곳을 종과 탑, 그리고 비석만이 지켰다.
그중 원각사 종은 광해군 이후 종각 즉 지금의 보신각에 매달리게 되었다. 범종으로서가 아니라 한양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로 자신의 임무를 바꾼 것이다. 그나마 1985년 새 종이 만들어지면서 지금은 박물관으로 옮겨져 쉬고 있다.
탑과 비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던 이곳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897년이었다. 당시 탁지부 고문으로 일하던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로 공원으로 조성되게 된 것이다. 탑이 있다고 하여 '파고다 공원'이란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탑동공원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며, 1992년 탑골공원으로 바뀌었다. 이 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공원으로 알려져 있다. 외래어 이름을 가진 첫 시설이 아닐까?
이때 만들어져 3·1운동의 현장이 된 팔각정은, 안내문을 살펴보니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건축가라고 하는 심의석이 건축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아울러 대한제국 황실의 음악연구소 시설로 사용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