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암 조병학씨.조규영
일제 강점기 당시, 일제의 갖은 핍박과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준 잘 알려지지 않은 인사들은 너무 많다. 송암 조병학(1942년 작고)·조중환(91)씨 부자(父子)도 이들 중 하나.
일제 감정기인 1940년대 초, 당시 조선총독부는 미국 선교사들이 운영했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등을 없애려 했다.
그러나 조중환씨는 일제의 갖은 압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육영사업에 뜻을 두었던 부친의 유언을 받들어 위기에 처한 세브란스에 60만평의 땅을 기증했다.
90세를 넘긴 고령이지만 조중환씨는 아직도 당시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는 일제의 압력을 당당히 이겨내고 부친의 뜻과 자신의 의지를 실천했다는 자부심으로 옛날을 회고한다.
지난 26일, 부인과 함께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조중환 옹을 만나봤다. 이기사는 책자와 본인의 증언에 따라 작성한 것이다.
봉일천 4리가 '송암동'이라 불리는 까닭
@BRI@조병학씨는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토지와 서울 서대문에서 '한성 정미소'를 운영하며 파주와 양주 등의 땅을 사들여 비교적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조병학씨는 1930년대 초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4리의 전답 약 13만평의 땅에 송암농장을 설립했고, 봉일천 4리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경지정리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 때 '경지정리'는 혁신적인 과학영농의 시효였다.
경지정리에 따른 소출의 증가로 그의 재산은 많이 불어났고, 이 사실이 일본에도 알려져 일본 학생들이 경지정리 기법을 배우기 위해 송암농장을 견학오기도 했다. 지금도 봉일천 4리는 송암동이라 불린다.
조씨는 낙후된 우리나라의 농업기술발전을 위해 송암농장을 비롯한 파주 일대의 토지를 출연해 봉일천 송암농업학교의 설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인(성명미상)도 문산 선유리에 문산농업학교의 설립을 조선총독부에 함께 신청했고, 민족자본에 의한 학교의 설립을 기피하던 조선총독부는 일본인이 신청한 학교를 승인했다. 결국 조병학씨의 뜻은 좌절되고 말았다.
1930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각 방면으로 우리나라에 대한 탄압정책을 구사해 우리의 문화·교육면에 있어서도 온갖 간섭과 탄압을 자행하였으며, 특히 민족자본에 의한 교육기관에 대한 간섭과 탄압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연세대학교사> 164쪽)
1937년 7월 일제가 다시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미국은 일본에 대해 경제적 압력을 가하게 됐으며 일본은 노골적으로 반미 태도를 취했다.
미ㆍ영계의 서구인과 선교계 기관에 대한 박해가 표면화됐고, 따라서 미국인 선교사가 세운 세브란스도 그 박해의 대상이 됐다.(<연세대학교사> 393쪽, <의학백년> 121쪽) 또한 일제는 민족말살의 목적으로 '국어사용'이라는 구호 하에 학교에서는 물론, 가정에서까지 일어사용을 강요했다.
다음해인 1938년에는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황국 신민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신사참배에 항거하는 선교사는 귀국하지 않을 수 없게 됐으며, 종교기관이나 종교계 교육기관은 존폐의 위기에 봉착하게 됐다.
결국 1939년에서 1940년 사이 세브란스의 에비슨, 마틴, 앤더슨 등의 교수진이 모두 귀국했다.(<연세대학교사> 165·382쪽, <의학백년> 1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