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오마이뉴스 권우성
이 말이 딱 맞다. 이해는 하지만 인정하긴 어렵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서울신문> 기자가 대선에 출마할 것인지를 물었다. 애매모호한 답변을 미리 차단해 버렸다. "정치를 하느냐, 마느냐로 계속 얘기가 많은데 확실하게 안 한다고 하면 될 것 아닌가?"
적절한 질문이다. 대선에 출마할 생각이 없으면 보도자료를 뿌리거나 인터뷰를 하면 된다. 어려운 일이 전혀 아니다. 그런데도 정 전 총장은 그러기는커녕 선문답 비슷한 언행을 계속해왔다.
이번에도 어김없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어떻게 정치를 절대 안 한다고 하나"라고 답했다.
<한국일보>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선 "사회로부터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으로서 사회에 무엇을 어떻게 해서 갚아야 할 것인지 생각 중"이라고 했다.
여전히 애매모호하다. 그래도 <서울신문> 기자가 기준점을 마련해줬다. "확실하게 안 한다고 하면 될 것"을 그렇게 하지 않은 점에 주목하자. 대선에 출마할 의향이 없는 건 아니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그런데 다른 말도 했다. "정치에 대한 내 생각은 진전이 없다"면서 "상당한 마음이 정해지기 전까지는 정치인들을 안 만날 거다"라고 했다.
대선에 뛰어들 생각이 있으면서도 정치인은 만나지 않을 거란다. 이런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리스크 관리에 능한 정 총장... '옹립' 될 때까지 기다리나
힌트가 있다. 김종인 민주당 의원이 한 말이다. 김종인 의원은 정 전 총장이 유일하게 만난 정치인이라고 밝힌 사람이다. 그런 그가 말했다. "적어도 새로운 정치세력이 탄생하는 등 여러 여건이 조성돼야만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확연해진다. 정 전 총장은 때를 기다리고 있다. 여건이 성숙될 때를 기다리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신을 '옹립' 또는 '추대'할 세력이 형성될 때를 기다리고 있다.
경제학자답다. 리스크 관리에 능하다.
정 전 총장은 정치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당연히 자신을 따르는 세력이 없다. 현재로선 대선전을 치를 최소한의 조직기반조차 없다.
비빌 언덕도 안개에 휩싸여 있다. 혼미를 거듭하는 범여권의 질서가 어떻게 정리될지 현재로선 가늠하기 어렵다.
이런 처지와 상황에서 속도를 높이는 건 위험하다. 자칫하다간 정치권과 언론의 검증공세에 시달리다가 상처만 입고 돌아설 수 있다. 지금은 호랑이 눈으로 쳐다보되 소처럼 걷는 게 유리하다.
이해할 수 있는 계산법이다. 정 전 총장 개인으로 봐선 그렇다. 하지만 국민의 관점으로 보면 인정하기 어렵다. 경제학자와 경영인은 엄연히 다르다.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한다. 그게 예술인지 기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치의 본령이 가능성을 현실태로 끌어올리는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을 달 여지가 없다.
정치는 갈등을 전제한다. 계층에 따라, 이념에 따라, 이해관계에 따라 난무하는 정책을 하나로 모아 집행하는 게 정치의 덕목이다. 때로는 돌파하고, 때로는 타협하면서 가능성을 현실태로 승화시킨다.
이 기능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정점에 서는 사람이 바로 대통령이다. 정부를 관장하고 여당의 지원을 이끌어내고 야당의 반발을 조정해간다.
원론은 이렇지만 실천은 어렵다.
대통령 직선제 도입 후 등장한 네 명의 대통령이 모두 직업 정치인 출신이었던 점(노태우 씨의 약간 다른 경우가 있지만 그 또한 7년 동안 정치권에서 과거 이력을 '세탁'했다는 점에서 볼 때 직업 정치인 출신으로 봐도 될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정치갈등에 휘말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된다. 정치는 난이도가 대단히 높은 예술 또는 기술이다.
기다릴 게 아니라 나서서 리더십을 보여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