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성문. 견훤이 쌓았다고도 하고, 금산사에서 왜구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도 있다.백유선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전투지였던 원평을 지나 조금 가다 보니 곧 금산사 주차장이 보인다. 매표소를 지나면 거의 무너질 듯 서 있는 홍예문이 방문객을 맞는다. 흔히 견훤이 세운 석성의 문으로 알려져 있어서 '견훤성문'이라 불리고 있다.
후백제를 세워 후삼국을 통일하려던 야망을 펼치던 견훤과 이곳 금산사는 인연이 깊다. 한때 미륵임을 자처했다고 하는 견훤이 이 절을 자신의 원찰로 삼고 중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견훤석성이 그 증거인 셈이나 이는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 확실하지는 않다.
@BRI@견훤은 자식 농사에 실패했다. 그가 후삼국 통일의 주역이 되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래서 옛 성현들은 수신제가(修身齊家) 다음으로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이야기했을 것이다.
견훤이 넷째 아들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가 맏아들 신검에게 붙잡혀 유폐되었던 곳이 금산사이다. 무려 3개월 정도를 이곳에서 갇혀 지내던 견훤은 간신히 탈출하여 왕건에게 투항했다.
그리고는 고려군의 선봉이 되어 자신의 세운 나라에 맞서 자신의 아들과 싸워야 했다.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갔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지 며칠 만에 울화가 병이 되어 죽고 말았다.
이곳에 오니 적전분열(敵前分裂)이란 말이 떠오른다. 아마도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서 가장 반성해야 할 표현 중 하나일 것이다. 그 때문에 망한 나라가 많다. 고조선이 그랬고 고구려가 그랬다. 후백제도 그 뒤를 따른 셈.
더구나 대업을 앞두고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이라니. 부모 형제가 권력을 두고 다투는 모습을 역사에서는 흔하게 본다. 멀게는 중국의 수, 당에서 가까이는 조선에서 그랬다. 속고 속이고, 때로는 서로 죽이기까지 했다.
오직 정치의 세계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러니 정치의 세계는 다른 어떤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곳이라는 평을 듣는다. 그저 영화 '타짜'와 같은 노름판과 비교한다면 가장 적절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부처의 세계로 다가가면서 이전투구의 정치판을 떠올리는 것은, 대선을 앞둔 정당들의 행태를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뉴스를 통해 보아야 하는 것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난 차라리 '쓰레기'를 외치는 '죄민수'의 코미디 프로가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