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퉁소를 불면서 주검이 든 관을 옮기고 있는 장례행렬.김성호
에티오피아의 전설에 따르면 역사적 사실과 달리 시바의 왕국이 과거부터 예멘이 아니라 에티오피아 지역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악숨도 1세기가 아니라 B.C.1000여 년 전에 세워졌다는 얘기이다. 실제로 시바의 여왕과 관련해서는 알렉산더대왕(알렉산드로스대왕. B.C.356∼B.C.323)을 둘러싸고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사이에 시조 논쟁이 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에티오피아와 예멘 사이에도 역사왜곡 논란이 빚어지고 있다.
시바의 여왕을 둘러싼 논란은 에티오피아인들의 조상이 바로 예멘에서부터 이주해온데다 에티오피아의 칼렙 왕(514∼542)시대인 525년부터 잠시나마 에티오피아가 예멘을 직접 지배하면서 에티오피아의 역사와 예멘의 역사가 뒤섞여 버린 데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시바의 왕국에 살다 에티오피아로 이주해온 선조들이 자신의 나라인 예멘과 여왕까지 에티오피아 역사로 가져오면서 전설과 역사적 사실이 혼재되어 버린 것.
에티오피아에서 유대왕국의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 그리고 법궤와 관련된 전설은 이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변형된 이야기들이 내려오고 있다. 그 내용이 어떻든 전설이 설령 역사적 사실과 어긋난다고 해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전설에는 그 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어디서 찾느냐 하는 민족적 정체성과 역사관, 세계관, 미래관, 종교관 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단군신화에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이 천제(天帝) 환인의 아들 환웅과 100일 동안 동굴에서 쑥과 마늘만을 먹으면서 생활해 곰에서 인간으로 변한 웅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은 바로 고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끈기 있게 참아내는 곰에게서 인내심과 자주성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에티오피아인들도 솔로몬 왕의 지혜와 영광, 시바의 여왕의 아름다움과 여왕으로서 사막과 바다를 건너는 험한 여정을 마다지 않고 지혜를 배우기 위해 솔로몬 왕을 만나러 갔던 개방성과 진취성 등을 전설을 통해 교훈으로 삼고자 했을 것이다.
시바의 여왕의 아들인 메넬리크 1세의 직계후손이라고 믿는 에티오피아인들은 자신들의 뿌리에서 국민통합과 민족적 자부심을 찾기도 했으나 역대 지배자들은 시바의 여왕의 전설을 통치의 정당성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1268년 예쿠노 암라크 황제는 자신이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의 후예라고 주장하면서 에티오피아의 솔로몬 왕조 재건을 내세웠다.
에티오피아가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의 후손이라는 전설을 수록한 케브라 네가스트는 바로 암라크 황제의 손자인 암다 세욘 황제시대인 14세기에 쓰였던 것. 이 황제들이 민중 사이에 내려오던 시바의 여왕의 전설을 통치수단으로 활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89년 메넬리크 2세 황제는 아예 이름을 시바의 여왕의 아들 이름을 따서 불렀고, 마지막 황제인 하일레 셀라시에도 자신은 솔로몬 왕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통치는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심지어 1974년까지 에티오피아 제국헌법에는 아예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전제하고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메넬리크 1세로부터 이어진 솔로몬 왕의 왕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규정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아무리 솔로몬 왕의 후손이라는 전설을 통해 영원한 통치권좌를 누리려던 에티오피아 황제들도 모두 폐위되었다.
자신의 출생신분을 아무리 미화해도 민중의 신뢰를 잃은 황제의 경우에는 혈통 자체가 황제의 자리를 보호해주지는 못했던 것이다. '짐은 곧 국가'라는 왕권신수설은 '국가의 주인은 민중'이라는 천부인권론과 국민적 저항권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황제의 통치권은 조상이나 혈통이 아니라 민중들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퉁소를 부는 에티오피아 전통 장례행렬이 지나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