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남소연
- 이것은 전향인가, 변절인가? 아니면 다른 표현이 가능한가?
"그런 걸 변절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시대변화에 맞는 운동의 변화라고 본다."
- 자연스러운 변화인가?
"운동은 사회적 조건에 대한 반응인데 조건 자체가 바뀌었다. 기존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처지에서 보면 여기(조건의 변화)에 부응해 새로운 노동운동을 세우려는 세력들을 변절자로 바라볼 수 있다."
- 실제 배 의원을 '변절자'로 평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노동운동은 진보운동이다. 그래서 진보의 의미와 내용을 제재로 파악해서 과거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변화된 조건을 활용해서 자유·평등·행복이라는 본래의 목적, 보편적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 시대변화를 너무 가볍게 보면 안된다."
- 무엇이 생각을 바꾼 결정적 계기였나?
"우선 형식적 민주주의조차 부여받지 못했던 체제가 87년 6월항쟁을 거치면서 직선제가 됐다. 노동법도 바뀌면서 노동3권이 부분적으로 보장됐다. 또 90년 후반기에 IMF라는 독특한 상황이 왔다. 이것은 한 국가가 잘못해서 온 것이 아니라 세계의 변화 흐름 속에서 불가피한 것이었다. 즉 국가주도형 개발독재모델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국가와 기업의 운영원리, 개인의 삶까지 다시 재점검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준비가 안된 우리 사회는 구조조정, 특히 인력비용 조정으로만 이것을 해결하려 했다. 당시는 문명사적 전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새로운 대응을 요구하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기업도 노동운동도 이것을 편의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IMF가 우리에게 던진 교훈은 더 이상 과거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에게도 이것이 닥쳐왔는데 이걸 위기상황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장기표 선생이 당시에 새로운 변화를 얘기하면서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었고, 김지하씨가 생명사상을 얘기했다. 그때 우리는 우리 사회의 새로운 운영원리를 마련하기 위해 기초부터 다시 세워보자는 토론을 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단선적 대립구조가 아니라 뭔가 새로운 것들을 찾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공감하게 됐다."
- 88년 해고된 이후 10년간의 해고자의 신분으로 살았다. 본인도 해고 이후 사상적 방랑을 거쳤다고 고백했는데 '해고'라는 개인적 상황이 생각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나?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고 이인제 장관이 노동부장관이 됐을 때 '신한국 건설'을 내세우면서 구질서에 저항했던 노동자들을 복직시키겠다고 천명했다. 그런데 제가 복직이 안되자 아버지가 이를 비관해 자살했다. 해고된 후 우유배달도 하고, 시장에서 장사도 해봤다. 노동인권회관에도 있었고 전해투에서 18일 단식투쟁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87년 노조를 결성했던 방식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유효한가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 당시에 무엇이 배 의원을 가장 힘들게 했나?
"우선 해고됐으니까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문제가 불안으로 남았다. 그 다음엔 노동운동 내부에 선이 자꾸 그어져 분열되는 것이 나에게 상당한 괴로움을 줬다. 분명히 그 안에서 새로운 것들을 논의하고 토론해서 새로운 실천을 만들 수 있다고 봤는데 뒤늦게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후배들은 그런 부분을 수용하기보다 (변화를 요구하는 것을 변절 등으로) 규정짓고 단정해 나를 대단히 어렵게 만들었다."
- 결국 외부 및 내부와 싸움하다가 지쳐버린 것인가?
"그렇다. 지난날의 상대, 즉 자본이나 권력과의 싸움은 (오히려) 편했다. 하지만 노선을 놓고 다투는 등 (운동) 내부의 분열은 나를 힘들고 어렵게 만들었다."
- 스스로 "많은 것을 잃었다. 형제와 같았던 노동계 지인들은 저를 배신자라고 낙인을 찍는 이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노동운동 내부의 비판이 가장 힘들었나?
"나는 노조를 설립한 사람이고 징역에도 갔다 왔다. 내가 서울지역노조협의회(서노협) 의장일 때 단병호 의원이 부의장, 심상정 의원이 사무처장이었다. 천영세 의원은 지도위원이었다. 제 해고문제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또 정치권의 요구가 있었음에도 제가 정치권에 가지 않고 노동계에 남아 있었다.
서노협과 지하철노조 세운 사람이 (노동운동의) 변화를 얘기했으면, 노동운동에 절박한 무언가가 있어서 저런 얘기를 하겠지 하며 한번쯤 경청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냥 무대포로 어용이다, 변절자다, 이렇게 얘기할 때는 섭섭했다. 당시 함께 싸웠던 사람들은 나에게 변절했다고 얘기하지 않았다. 87년 열려진 공간 속에서 뒤늦게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후배그룹들이 나에게 (변절자니 어용이니 하는) 딱지를 붙였다.
내가 노동운동 1세대로서 고민 속에서 얘기한 것인데 충분히 알아보려 하지 않고 '자본의 품에 들어가려고 했다'면서 변절을 얘기할 때 참 힘들었다. 징역 살 때나 해고될 때보다 더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노동운동 후배그룹이 나에게 변절자·어용 딱지를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