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마다 서는 랄리벨라의 장터 모습.김성호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 무엇을 하나 보니 곤다르에서와 마찬가지로 토요시장이 열린 것이다. 마침 내가 랄리벨라에 도착한 날이 6월 17일 토요일이었다. 우리 농촌에서 옛날에 닷새마다 5일장이 열렸듯이 이곳에서는 일주일에 한번 토요일마다 시장이 열린다고 한다.
토요시장을 가기 위해 숙소에서 나오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어린이 2명이 장터를 안내하겠다고 바짝 따라붙는다. 어차피 시장터가 북적거려 안내자 없이 가면 헤맬 수도 있을 것 같아 2명을 안내자로 삼았다. 1비르(800원)씩 주고서.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이 달라붙자 자신들이 공식 안내자라며 쫓아내고, 신이 나서 시장 곳곳을 안내하며 물건 이름들을 설명한다. 랄리벨라를 여행하면서 상당히 귀찮은 것 중 하나가 바로 수십 명의 아이들이 안내자 역할을 하겠다며 졸졸 따라붙는 것이다.
워낙 가난하다 보니 외국 여행객만 만나면 20여 명의 아이들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그래서 아예 일찌감치 한두 명의 꼬마 안내자를 삼는 것이 오히려 편할 때가 많다. 에티오피아 아이들의 초등학교 취학률이 31% 정도밖에 안 되니 어린이들이 대부분 아예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다. 9년간 중학교까지 무상 의무교육을 하는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이들의 교육과 건강, 생활상태가 열악하다 보니 외국 여행객 안내를 통해 돈을 벌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장터에는 향료며 소금, 고추, 전통음식인 인제라 재료로 쓰이는 테프와 과일, 노새 등 흔히 시장터에서 살 수 있는 모든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인근에 있는 농촌 사람들이 직접 지은 농산물들을 팔기 위해 장터로 몰려든 것이다.
꼬마 안내자들은 "여기 물건 파는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지은 농산물을 팔기 위해 4∼5시간 걸어서 온 사람들이 많다"며 장터에 팔기 위해 놓아둔 소금과 후추를 집어서 나에게 맛을 보도록 하는 등 '공식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 애를 썼다.
아이들이 나에게 맛을 보도록 하기 위해 물건을 집어도 누구 하나 나무라지 않고 웃으면서 외국 여행객이 맛보는 것을 지켜보았다. 일부는 햇빛가리개를 설치해 물건을 파는 상인도 있었지만, 대부분 강한 햇볕 아래 포대 등을 깔고서 그대로 고추와 테프, 과일 등을 팔고 있었다. 워낙 햇볕이 강하다 보니 비 우산을 들고 와 햇볕을 가리는 사람도 가끔 눈에 띄었다.
아프리카에서는CNN보다 BBC WORLD 위성채널을 많이 본다
시장을 둘러보는 데 햇볕이 너무 따가워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휴식도 취하고 점심을 먹기 위해 근처 음식점에 들어갔는데, 이 시골에도 텔레비전이 있는 것이 신기했다. 위성 텔레비전인데 화면 상태는 그리 깨끗하지 않았으나 볼 만했다. 영국의 공영방송인 BBC WORLD 채널에서 요란한 퍼레이드 행사를 중계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6월 17일을 맞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80세 축하 행사를 생중계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80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정정하고 품위있는 모습으로 왕실 기병대의 호위를 받으며 백마가 끄는 황금마차를 타고 런던 버킹엄 궁 앞에서 퍼레이드를 하고 있었다. 에티오피아는 지난 1937년 이탈리아의 침공으로부터 1941년 독립할 때 영국의 도움을 받아 전통적으로 영국에 호의적이라는 것을 여기저기서 느낄 수 있었다. 에티오피아뿐 아니라 동아프리카를 여행하는 동안 아프리카 사람들은 대부분 미국의 케이블 뉴스전문 채널인 CNN보다는 영국의 BBC WORLD 채널을 보고 있었다.
미국의 CNN은 동부아프리카에서 거의 볼 수 없었고, 남아공과 보츠와나, 나미비아 등 남부 아프리카에서야 겨우 볼 수 있었다. 아프리카 전반에 퍼져 있는 반미 감정과 동남부 아프리카 국가의 대부분이 영국의 식민지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독립을 했음에도 여전히 옛 식민지 지배국가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는 것.
식당 주인에게 "CNN은 보지 않느냐"고 묻자, "미국 방송은 볼 필요가 없다"는 반응이 즉각 돌아왔다. 아프리카에서 만난 사람들이 대부분 반미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데 시장을 안내했던 아이 중 한 명이 나를 보고는 달려온다. 손에 무엇인가를 꼭 쥐고 있다가 나에게 주면서 선물이라고 한다. 나무로 만든 작은 십자가에 허술한 끈으로 연결한 십자가 목걸이이다. 시골에 있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목에 거니 그런대로 어울렸다. 제품이야 장난감 수준이지만, 어린아이의 마음이 전해지니 뭉클하다.
7살 정도의 어린아이는 장터 안내자로서 자신에게 준 1비르에 대한 고마움으로 십자가 목걸이를 보답으로 주었겠지만, 십자가 목걸이에 담긴 가치는 100달러 이상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특별한 종교를 믿지 않는 나였지만, 나무 십자가 목걸이를 그 자리에서 내 목에 걸었다. 십자가 목걸이를 걸으니 마치 온갖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것 같은 평온함이 같이 매달려 있는 느낌이 들었다.
예상치 않았던 아프리카 시골 아이로부터 받은 호의는 마음 한편을 찡하게 하면서 여행객의 닫혔던 마음의 문도 활짝 열어젖혔다. 졸졸 따라다니던 어린아이들을 귀찮아하고 경계했던 나의 마음을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들켜버린 것 같아 부끄러움이 다가왔다. 아프리카 여행을 하다 보면 아이들의 도움을 받을 때가 많은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만큼 아이들은 어디나 순수하기 때문이다.
신비로운 랄리벨라 지하암벽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