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7월 19일 대학로에서 합류한 수천명의 노동자, 학생이 평화행진을 하려고 경찰의 봉쇄 풀리기를 기다리다 끝내 풀리지 않아 분영히 일어나 싸울 것을 결의했다. 7월 노동투쟁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연합뉴스
'제3의 위임'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신생 민주주주의에서 종종 나타나는 '위임민주주의'의 경향이다.
대통령이 직선을 통해 국민의 직접적인 위임을 받고, 고정된 임기를 보장받고, 탄핵 등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고서는 대통령의 책임을 묻기 힘든 대통령 중심제 하에서는 그 어느 대통령도 '민주적으로 선출된 독재자'로 변신할 개연성이 상존한다.
참여정부 들어 사법부의 부상, 보수언론의 견제, 시민단체들의 비판, 집권당 내부의 반발 등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권한은 여전히 강하고, 일반 국민이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가지는 접근성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민주화 이후 20년 동안 나타난 이와 같은 '3중의 위임'은 결국 한국 민주주의를 대단히 협애하고 취약하고 불안정한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위임'이 지배적인 특성이 되어버린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서 좌절, 소외감 그리고 배신감은 당연하다.
3중의 위임으로 시민사회가 소외·배신당했고, 계급운동이 소외·배신당했고, 마침내 국민 전체가 소외·배신당했다.
3중의 위임, 결국 국민 모두 배신당했다
노무현 정부의 실정과 혼돈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인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호적인 (혹은 우호적이었던) 인사들도 식상할 정도로 여러 차례 논의한 바 있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국민으로부터 받은 위임과 실제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정책 간에 괴리가 컸다.
노무현 정부가 2002년 부여받은 대중적 위임의 본질은 정치·경제·사회 전 영역에서 개혁정책을 일관되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추진하라는 것이었다. 개혁은 현상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므로 약자인 노동자와 일반 서민의 삶의 개선을 도모하는 정책이 추진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정권은 그러한 국민적 위임을 배반하고 어느 우파 정권이 추진했을 법한 것보다도 더 강력한 '보수혁명'을 추구하였다. 노동 및 사회·복지정책은 형해화되었고, 고용은 양적·질적으로 악화되었으며, 빈부격차는 증가했고, 중산층은 해체되었다.
혼돈은 경제 분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햇볕정책 계승은 대북송금특검으로, 자주외교는 '수용소' 발언으로, 동북아균형자론은 이라크파병으로, 동북아공동체론은 한미FTA 추진으로, 작통권 환수는 북핵 실험 이후 핵우산의 구걸로 오락가락하며 진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