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촨성 광유안 황쩌스(皇澤寺) 안에 모셔진 측천무후동상. 광유안에서 측천무후는 불교의 보살과 같은 숭배와 신앙의 대상이다.모종혁
태조의 후궁에서 고종의 황후로, 다시 황제로
1300여년 전 당시 세계 최대 대제국인 당나라를 일시 폐하고 자신의 왕조인 주나라를 개국한 무측천. 그는 오늘날 극단적인 평가가 엇갈리는 여황제이다.
624년 쓰촨성 광유안에서 태어난 무측천은 14세 때 태종의 후궁으로 발탁되어 황궁으로 들어간다. 태종이 죽자 당황실의 전통에 따라 다른 후궁과 함께 비구니가 되었으나 태자 시절부터 자신을 흠모한 고종에 의해 환속되어 총애를 받는다.
총명한 두뇌와 능수능란한 정치술로 655년 황후에 오른 무측천은 오랫동안 병석에 누운 고종을 대신하여 전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당시 당나라는 철저한 귀족 위주의 계급사회였는데, 무측천은 정치와 경제를 독점했던 귀족층을 배척하고 출신을 불문하여 능력이 뛰어난 신진관리들을 등용했다.
683년 고종이 죽자 자신의 아들인 중종, 예종을 차례로 즉위시켜 꼭두각시로 삼은 무측천은 자신에 반대하는 황족과 귀족세력을 가차없이 탄압하고 죽였다. 탄압에는 자신이 낳은 자손들도 비켜가지 못했다.
무측천은 690년 스스로 성신황제(聖神皇帝)에 오르는데, 적인걸·위원충 등 명신들을 등용하고 적절한 재정정책과 농경장려로 국가경제를 튼튼히 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다.
이 때 다져진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와 풍성한 경제기반, 중용된 신진관료들은 705년 무측천 사후 복원된 당나라가 현종의 태평성대인 '개원의 치'를 다지는 초금석이 된다.
잔혹무도하고 음란한 암탉이라고?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 황제나 왕은 용납되지 않는다. 무측천은 240여명의 중국 역대 황제 중 한 명임에도 훗날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비판적이었다.
특히 "암탉은 새벽을 알리지 못하고 암탉이 새벽을 알리면 가정이 망할 때뿐이다"(상서)는 유교적 제왕학이 자리를 잡은 송나라 이후 무측천은 "가혹한 관리를 임용하여 잔인한 정치를 한 역사상 가장 흉악한 사람"으로 폄하되며 '무후'로 깎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