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 석굴암 삼존불 중 본존불. 근엄한 표정과 양쪽어깨를 감싼 옷이 동대사 노사나불과 닮았다.신병철
노사나불 앞에는 당시에 만들었다고 하는 대좌의 위로 핀 연꽃(앙련)이 있다. 크기도 대단하고, 새겨넣은 불상의 모습도 상당히 세련되었다. 당시 불교 그림의 일부를 느낄 수 있다.
노사나불 좌우에는 협시보살 두 분이 앉아 계신다. 그리고 대불전 네 귀퉁이에는 사천왕상도 서 있다. 일단 모두 거대하다. 조각 기법도 대단하다. 당시에 만든 것인지 이후 어느 때 만들어 세운 것인지 파악할 길이 없다. 다만 일본화된 모습이 보이지 않아, 8세기에 만든 것은 아닐까 여겨진다.
동대사는 752년에 완공하고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완공식은 노사나불의 눈동자를 그려넣은 의식인 개안식을 겸했다. 이때, 통일신라에서 700여명의 사람들이 이 잔치에 참여했다고 한다. 동대사 건립 과정은 일본과 통일신라 사이에 긴밀한 관계의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한동안 백제를 지원한 일본과 관계가 소원하였으나, 곧 관계가 회복되고, 양국은 활발한 교류를 벌였다. 이 당시 일본은 수, 당, 신라를 통해서 불교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수와 당보다는 통일신라로부터 직접적으로 불교문화를 전수받았다.
특히 8세기 중엽 일본 쇼무왕(聖武)은 신라의 불경해설서를 구입하여 그것을 옮기는데(寫經) 주력하였다. 이어서 그는 신라 승려 심상을 초청하여 화엄경 강설을 듣고 이에 크게 심취하였다. 화엄경 강설에 감명을 받은 쇼무왕의 발원으로 이루어진 사찰과 불상이 동대사이고 노사나불이었다. 당시 일본의 건축기술 수준을 볼 때 신라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대사의 원래 이름이 대화엄사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