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 전 총리.오마이뉴스 권우성
어떤 정치적 의도인가? 한 가지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로부터 출발하자. 그것은 노 대통령이 '전 총리 고건'이 아닌 '대선후보 고건'을 '거시기' 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왜 이제 와서 '거시기'하게 생각할까? 노 대통령의 희망을 실현해 주지 못한 무능력 때문에? 아니면 박정희 정권 때부터 양지만을 좇은 관료출신이므로? 그것도 아니면 민정당 국회의원까지 지낸 그 불쾌한 전력 때문에? 모두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주요한 이유는 아니다. 주요한 이유는 그가 '범 호남출신'이기 때문이다.
건전한 상식을 가진 이라면 나의 이 말을 당연히 터무니없다고 느껴야 한다. 그렇지만 노 대통령이 '호남출신 고건'을 '거시기' 하게 생각한다는 나의 주장은 노 대통령을 향하는 파편적인 지역주의 공세가 아니다. 그것은 '노무현 이데올로기'의 필연적 귀결이며 이미 오래 전부터 충분히 예측해 온 일이다. 우리는 지금 막 '노무현 이데올로기'의 마지막 장을 펼쳤을 뿐이다.
노 대통령은 아마 역사에 남을 자신의 가장 큰 '업적(?)'이 있다면 그것은 민주당의 법통과 단절하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함으로써 마침내 지역문제 해결의 잠재적 토대가 될 영남의 열린우리당 지지율을 높인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역사적 업적'이 물거품이 될 수 있는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신당파는 열린우리당의 해체 혹은 탈당을 도모하고 있으며 '호남출신 고건'은 그간 노 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인 작품 '부산정권'에 힘입은 영남에서의 지지율 상승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 위험의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한나라당 영남후보 아무개와 통합신당 호남후보 고건이 대선에서 맞붙는다면 고건을 찍을 영남인이 얼마나 될 것이며 한나라당 영남후보 아무개를 찍을 호남인이 얼마나 될 것이냐는 것이다.
물론 냉정한 관찰자의 입장이라면 어차피 그런 일은 그 토대가 모래성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당연한 현상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업적'이 한순간에 모두 무너져 내린다는 '상상된 아픔'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노 대통령은 '보수주의자 고건'이 아닌 '호남출신 고건'이 너무나 '거시기' 한 것이다.
내겐 너무 거북스런 '호남 출신'
그렇다고 해서 노 대통령을 포함해 친노세력 누구라도 21세기 개명천지에 "난 '호남출신 고건'이 '거시기' 하다"고 말하고 다닐 순 없을 것이다. 방법은 딱 한 가지 뿐이다. "난 '호남출신 고건'이 '거시기' 한 것이 아니라 '보수주의자 고건'이 '거시기'하다!"고 우기는 것이다. 어떤가? 조금 멋있어졌는가? 여차하면 "난 '호남출신 정동영'이 '거시기' 한 것이 아니라 '실용주의자 정동영'이 거시기 하다"고 이름 하나만 바꿔도 된다.
그런데 이런 구호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왠지 "난 '호남출신 김대중'이 거시기 한 것이 아니라 '빨갱이 김대중'이 거시기하다"는 영패 사회의 공인된 이데올로기적 은어를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참고로 '이른바' 진보ㆍ개혁세력이 신뢰하는 최장집 교수 식으로 말하면 노무현이든, 고건이든, 정동영이든, 유시민이든, 김대중이든, 김영삼이든 모두 같은 도토리과에 속하는 '(중도) 보수'에 불과하다.
내 주장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다시 한 번 곱씹어 보겠다. 고매한 노 대통령이 정말 '보수주의자 고건'이 아니라 '호남출신 고건'을 '거시기' 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분명히 그렇다. 상기해보라. 노 대통령이 한나라당 출신 영남 보수주의자 김혁규 의원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는 세상이 다 알고 있다. 뻔한 사실을 부정하면 안 된다.
우스운 일이지만 지금도 노 대통령의 '통합신당=호남 지역주의 회귀=필패론'과 쌍을 이룬 채 '열린우리당 사수=반지역주의 영남(비호남)후보=필승론'이라는 친노파들의 공세가 부끄러움을 모르고 공공연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 마디로 내년 대선을 목전에 둔 노 대통령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진보/보수' 기준이 아닌 자신의 지역구도 타파 프로그램을 실현시켜 줄 '영남인', 적어도 '비호남인'인 것이다.
누구나 이런 불면의 상황에 부딪히면 쓸데없는 잡념이 떠오를 것이다. "만약 4년 전에 고건을 총리로 임명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호남출신 대선후보 고건'이 존재할까?" 그럴 때마다 후회막급일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실패해 버린 인사" 발언은 안 하는 게 나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얼핏 "내 정치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것이 '무현이'를 국회의원 시킨 것"이라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씰데 없는 소리'만을 연상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서 우리도 노 대통령의 '작업'에 직접 참여해 보자. 만약 '호남출신 고건'이 어느날 갑자기 지구를 떠나고, 그래서 갈 곳 잃은 신당파들이 그대로 눌러 앉아 열린우리당의 영남후보(혹은 비호남후보) 대 한나라당의 영남후보로, 즉 노 대통령이 오매불망 염원하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라는 '양대산맥' 간 영남후보만으로 대선이 치러지면 우리나라 지역문제가 눈 녹듯 사라지게 될까?
'제정신'을 갖고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앞으로 영원히 호남후보는 대선에 나오지 않는다는 조건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 노 대통령의 지역구도 타파 프로그램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물어야 한다. 도대체 노 대통령 식으로 해결된 지역문제가 호남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인권차원의 문제제기는 차치하고라도 노 대통령은 정말 이것을 지역문제 해결이라고 믿는 것일까?
지역주의 타파와 고건 전 총리
고 전 총리도 이런 사태에 직면해 뭔가 느낀 것이 있길 바란다. 소수 호남의 지지를 받는 김대중은 낙선이 뻔하므로 다수 영남의 지지를 받는 김영삼에게 후보를 양보해야 하고(=영남후보론), 그렇지 않은 김대중은 모든 지역주의의 축이며(=통합신당 지역주의 회귀론), 김대중 낙선 이후의 민주화ㆍ개혁은 영남의 이기택이 주도하되 호남은 표만 주면 된다(=위선적인 호남 없는 개혁론)는 영패 이데올로기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단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앞으로 20년, 아니 200년 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분명히 말한다. 나는 '민정당 출신 고건'의 대통령 당선 여부에 겨자씨만한 관심도 없다. 나의 관심은 지역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호남인은 절대로 대선에 나와서는 안 되지만 영남인은 얼마든지 대선에 나와도 좋다는, 아니 가능하다면 영남인들끼리 대선에서 맞붙는 것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이다는 오래된 반문명국가적 인권침해 이데올로기와 싸우는 일이다. 돌도끼를 들고서라도 이 원시적 이데올로기와 정면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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