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늘 고마웠고, 존경했습니다"

시아버지 기일을 맞아, 아버님을 떠올려 봅니다

등록 2006.11.17 11:02수정 2006.11.21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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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이 타고 가신 꽃상여입니다.
아버님이 타고 가신 꽃상여입니다.장순순
어제(16일)가 아버님 기일이었다. 돌아가신 지 만 한 해가 된 날이었다.


지난해 오늘(17일), 아버님은 아침에 어머님 독감 예방접종을 위해 직접 운전을 해 읍내 보건소에 다녀오셨다. 집에 돌아오셔서 전날 떨어진 은행을 주우러 집 앞 은행나무 아래에 가셨다가 쓰러지셔서 유명을 달리하셨다.

아버님께서 쓰러지셨다는 어머님의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가평집으로 향하던 기차 안에서도 나는 아버님이 몸져누우시게 되셨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대책을 고민했을 뿐이었지, 그렇게 빨리 세상을 뜨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렇게 아버님은 일흔두 해의 삶을 마감하셨다.

아버님이 저 세상으로 가셨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꿈만 같더니 벌써 1년이 되었다. 직장에 연가를 내고 하루 종일 제사 준비를 했다. 큰며느리인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준비하면 될 터인데, 좁은 소견에 하루 종일 왠지 모를 심술이 나 자신을 불편하게 했다.

며칠 전부터 계속되었던 수면부족도 한 원인이었으리라. 남편은 지방에서 서둘러 상경했고, 저녁이 다 되어서 형제들, 친지들이 왔다. 제사상을 다 차렸을 무렵 아버님의 제자 두 분이 오셨다.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던 아버님의 오래된 제자들이다. 서둘러 제사를 모시고 설거지를 마쳤다. 집안 어른 몇 분만 남고, 다들 서둘러 돌아갔다.

마무리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줄곧 내 눈치만 보던 남편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자기는 가만 보면 뒷정리를 잘 못하니까 뒷정리는 내가 할게. 저리 가 쉬어"라고 한다. 남편의 배려에 작은 웃음이 나왔다.

하루도 아버님 생각은 안 한 적이 없다는 남편


남편과 함께 이것저것 집안을 정리하고 자리에 누우니 자정이 훌쩍 넘어 있었다. 남편이나 나나 다음날 출근해야 하므로 서둘러 자야 할 터인데 잠이 쉽게 오지 않는다. 남편에게 하루 종일 내 좁았던 속내를 털어놓다보니 아버님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다.

남편은 아버님이 가신 후 하루도 아버님 생각을 하지 않을 적이 없다고 했다. 사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남편이 제일 걱정스러웠다. 그런데도 의외로 남편은 잘 견디고 있구나 싶었는데 속으로는 많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별 표현이 없는 남편이 묵묵히 견뎠을 1년을 생각하니 미안하기도 하고, 마음이 아려왔다. 이 가을을 보내면서 남편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었다. 오늘 같은 날은 더더욱 힘들었을 터인데….


아버님은 평생을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재직하시다가 교장선생님으로 정년을 하신 교육자이시다. 함자는 '박자, 승자, 만자'. 40년이 넘는 교직 생활 동안 경기도 가평을 떠나보신 적이 없었다. 집안에서뿐만 아니라 마을에서도 어른이셨던 분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전원일기의 '김 회장'과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평생 교편을 잡으셨던 아버님은 생활 속에서도 교육자로서의 모범을 그대로 보이셨던 분이다. 정년 이후에도 노인대학장으로, 문화원 이사로서 지역 일에 조용히 봉사하셨다.

감히 며느리로서 자신 있게 말하건대, 우리 아버님은 존경할만한 선생님이요, 시어른이셨다. 공부한다고 아들과 떨어져 살고 있는 며느리를 흠 있다 하지 않으시고, 늘 격려해주셨던 분이다.

며느리인 내가 당신 아들과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한 미안함을 표하노라면 "나는 네가 그렇게 공부를 했는데, 집에 있으면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닌다"라고 하신 분이셨다. 주변 사람들이 세상의 잣대로 세상물정 모르고 공부만 하는 아들과 며느리를 평가하면, 오히려 사람들의 식견부족을 탓하시면서 우리를 위로해주셨던 분이다.

모든 일들을 꼼꼼하게 기록해 놓으신 아버님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여러 권의 일기장이며 업무수첩, 각종 파일들이 나왔다. 당신이 교직에 처음 발을 디디셨을 때의 이력서, 교직자격증부터 정년에 이르기까지의 기록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정리해서 몇 권의 파일로 정리해 두셨고, 업무수첩에는 학교행사며, 집안의 대소사며, 하루하루 지냈던 일 등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20세기를 살았던 한 교육자의 삶이 생생하게 기록된 컬렉션 그 자체였다. 일기장에는 집안일이며, 당신께서 가르치셨던 학생들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적혀 있었다. 집안 구성원들에 대한 걱정, 제자들의 물질적인 어려움에 대한 기록 등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오늘은 OO에게 학용품값 얼마를 주었다. 드디어 OO의 등록금을 해결해줄 수 있게 되어서 그 아이가 중학교에 가게 되었다. 다음에도 이런 경우가 생긴다면 언제라도 이번처럼 마련해 줄 것이다. 이런 것이 교육자로서의 큰 기쁨이 아니겠는가?"

당신과 가족에게는 지나치다 할 정도로 검약하셨으나 주위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실 줄 모르셨기에 정년 이후 아버님에게 남겨진 것은 연금뿐이었다. 그런 아버님께 이 속 좁고 욕심 많은 며느리는 세상에 가장 비현실적인 분이라고 뒷이야기를 하기도 했었다.

우리 아버님은 더할 수 없이 자상하신 분이셨다. 바쁜 자식들을 위해 과감하게 용단을 내리시어 집안의 제삿날을 모두 합쳐서 하루로 정하셨고, 돌아가시던 해에는 당신이 돌아가시면 묘지 관리도 쉽지 않을 거라시면서 서둘러 종중 납골당을 손수 만드셨다.

장례식 후, 나의 꿈에 나오신 아버님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우리가 주관이 되어 첫 제사를 지내던 날 지방을 준비하던 남편과 나는 참으로 당황했었다. 당신 사후 아들이 제사를 주관할 때 혹시 흉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염려가 되셨는지 고조부모부터 당신에게 이르기까지 지방 샘플을 손수 만들어 놓으셨던 것이다.

집안의 대소사에 관한 기록부터 재산내역, 연금증서, 심지어 연금수급자를 어머니로 전환할 경우 문의할 기관과 전화번호까지 꼼꼼하게 정리해서 하나로 파일을 해놓으셨다. 언젠가 이 기록물을 통해서 20세기 중후반을 몸소 경험하셨던 한 교육자의 삶을 조명하는 논문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버님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후 꿈에 아버님이 오셨었다. 꿈속에라도 한 번 나타나셔서 왜 그렇게 갑자기 가시게 되었는지 말씀이라도 해주셨으면 했던 내 소망이 반영되었을까? 더 없이 편안하고 환한 얼굴을 하신 채 현관문에 들어오시는 것이었다.

"아버님, 웬 일이세요?"라고 했더니 "애들이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셨다. 가신 곳이 좋으시냐고,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하시느냐고 했더니 "걱정하지 말아라. 아주 편안하다. 내가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겠냐. 가르치는 것 말고"라고 하셨다. 우리 아버님은 천생 교육자이신 모양이다.

"아버님. 안녕하시지요. 저희도 잘 있어요. 애들도 잘 있고요. 아버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잘 살게요. 부디 저 세상에서 편안하게 잘 계세요. 생전에는 잘 표현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말씀드립니다. 아버님 늘 고마웠고, 존경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아버님에 관한 글을 한 번은 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것 저것 생각보다 정리가 안되더군요.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 몇 자 적어봤습니다.

덧붙이는 글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아버님에 관한 글을 한 번은 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것 저것 생각보다 정리가 안되더군요.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 몇 자 적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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