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미군기지 확장지역을 가다

서탄면 황구지리 마을

등록 2006.09.29 15:22수정 2006.09.29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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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에는 미군기지가 두 개나 있다. 팽성읍 안정리에 있는 K-6기지와 평택시 신장1동에 있는 K-55기지가 그것이다. 하지만 K-55기지는 오산공군기지(캠프 험프리즈)라는 이름을 갖고 있어 사람들은 오산시에 있는 줄 안다.

기지 이름에 ‘오산’이라는 지명이 붙게 된 것에 대해서는 설들이 구구하다. 어떤 사람은 초대 기지사령관이 부임할 때 오산역에서 내려 기지로 들어왔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부대 안까지 연결된 철로가 오산역에서 갈라져 들어왔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K-55기지 한 귀퉁이에는 대한민국 공군 작전사령부가 자리 잡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의 하늘을 미군이 도맡았기 때문이라지만 군사적으로 예속된 우리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씁쓸하다.

세상의 관심이 온통 대추리로 쏠려 있지만 사실 K-55기지도 확장된다. 대추리 도두리처럼 이곳도 황구지리, 금각2리 등 마을이 두 개나 사라지고 금싸라기 같은 금각들 55만평이 수용된다. 미군기지확장반대 깃발을 먼저 꽂은 곳도 이곳이다. 평택지방 시민들의 중지를 모아 땅 한 평 사기운동을 벌여 655평에 ‘평화의 논’이라는 팻말을 꽂아 놓은 곳도 이곳이다.

그랬는데 지금은 잊혀졌다. 반대운동도 사그러들었다. 주민들이 마을과 토지수용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수 백 년 살아온 고향을 등지는 것을 결정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뿌리를 뽑아내는 아픔이고 고향에 대한 영원한 짝사랑의 시작이다. 그런대도 이들이 수용을 받아들인 것은 한마디로 마을에 사는 것이 징글징글해서다.

황구지리는 황구지천과 진위천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그래서 1973년 아산만 방조제가 준공되기 전만 해도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올라왔고 조선시대에는 항곶포라는 포구도 있었다. 항곶포는 화성시 양감면으로 건너가는 나루며 아산만을 통해 들어오는 새우젓, 황석어젓, 강다리, 숭어가 교역되는 장소이기도 했다.

가깝게는 오성면 당거리나, 길음리 어부들이 해산물을 가져왔고, 멀게는 인천과 옹진군의 어부들이 생선과 젓갈을 들여왔다. 마을 남동쪽으로는 해정들, 양성들, 금각들, 황구지들 같은 들판이 형성되었다. 들판이 개간된 것은 조선 후기다. 그래서 궁방전이 많았는데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사업 때에도 총독부에 빼앗기지 않고 해방 직후까지 이(李) 왕실이 보유했었다.


국가와 부재지주의 땅이 많다보니 주민들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일제 말 강제공출 때에는 수확량의 50%를 먼저 공출하고 나머지로 지주와 5:5 또는 3:7로 나누어야 했으므로 목숨부지하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마을 주민들은 어려운 세월을 서로 격려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미군기지가 들어서면서 마을환경이 많이 변했다. 생활 기반이었던 해정들과 양성들도 사라졌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주민들을 괴롭힌 것은 비행기 소음이었다. 황구지리 마을은 K-55기지에서 비행기가 떠오르면 음속을 돌파하는 지점에 위치하여 엄청난 소음에 시달려야 했다.


항의도 많이 했고 소송도 여러 차례 걸었다. 주민들의 거센 항의에 전문가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소음측정도 여러 번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소음측정만 나오면 비행기가 뜨지 않았다. 주민들은 그것을 조사단의 배후에 정부와 미군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것이다.

정든 고향을 버리고 보따리를 싸기로 한 것에는 이 같은 사정이 작용했다. ‘정부가 하는 일에 반대한다고 이길 수 있겠는가’라는 정서도 한 몫 했다. 그래도 수 백 년 함께 살아온 정(情)을 버릴 수 없어 뿔뿔이 흩어지기 보다는 집단이주를 선택하였다.

이주 장소는 고덕면 좌교리 부근의 미 공군 탄약고 자리라고 한다. 분배되는 대토는 대지와 텃밭을 합쳐 150평이라고 했다. 정부는 현대가 개발한 서산농장에 농지(農地)도 준다고 했다. 그런데도 주민들은 반갑지가 않다. 늙은 육신을 끌고 서산까지 농사지으러 가는 것도 엄두가 나지 않고, 분배된 대토에 집을 지을 수 있는 돈도 없기 때문이다.

몇 천 평 농사 짖던 농사꾼이 50여 평 텃밭이나 일구며 먼 하늘만 쳐다보는 것도 답답하고 괴롭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보다도 선대부터 수 백 년을 살아온 고향을 자신들의 대에 영원히 잃는다는 사실은 참기 힘든 고통이다. 그래서 노인회장 황영승(76)씨는 술을 마신다. 술을 즐겨하지 않는 이평기(71)씨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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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연구를 하고 있으며 평택인문연구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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