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은 우리들의 목숨이다

대추리의 역사, 대추리 민중들의 절규

등록 2006.09.22 15:35수정 2006.09.22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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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가을 그리고 대추리

김행정(65)씨는 대추리 주민이다. 그는 이 마을에서 33년을 살았다. 충남 공주 벽촌에 살던 그의 가족들은 가격이 1/3밖에 안 되는 땅이 지천이라는 말만 듣고 이주를 하였다. 소금기가 버글버글했던 간척지 땅이었지만 손이 부르트도록 일해 옥토로 만들었다. 이렇게 얻은 옥토는 자식들을 길러주고 이웃과 살가운 정을 나누게 하였다. 노년에 접어든 그의 꿈은 단순하다. 남은 여생을 정든 이웃들과 살다가 평생을 바쳐온 이 땅에 묻히는 것이다.

그의 소박한 꿈은 2년 전에 들려온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무너져버렸다. 황새울과 도두리벌에 미군기지가 확장된다는 소식이었다. 미군기지가 확장되면 땅도 내놔야하고 마을에서도 쫓겨날 것이라고 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소식에 주민들은 분노했다. 빠르게 대책위원회가 꾸려지고 본정농협 앞에서 촛불집회가 시작되었다. 김행정씨도 촛불집회에 열심히 참석했다. 이주대상이 아닌 마을 사람들이 이탈할 때도, 혈육보다도 가깝게 지냈던 이웃들이 보상금을 받아들고 뿔뿔이 흩어질 때에도 마음을 다잡고 눌러 앉았다. 이렇게 버티다 빈손으로 쫓겨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땅을 지키려고 하는 그의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빈집 강제철거가 있던 9월 13일에도 아픈 아내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왔다. 병원에 가면서 원정삼거리를 지날 때 한층 강화된 경비를 보고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조급한 마음으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원정삼거리에서 전경들이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주민이라고 악을 썼어도 소용없었다. 할 수 없이 아내 혼자 차에 남겨두고 3㎞를 걸어서 들어왔다. 그랬는데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집이 부서지고 없었다. 이웃사람들이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항의하는 바람에 공사를 중단했다지만 지난 33년 동안 살아왔던 그의 집은 벌써 무너져 내리고 없었다.

대추리, 도두리는 지금 싸움 중이다. 주민들은 2년 넘도록 밤만 되면 촛불을 켜든다. 총, 칼을 들 줄도, 각목을 휘두를 힘도 없는 늙은 노인들이 촛불을 켜든 것은 고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다. 촛불집회는 추위가 찾아들면서 아리랑고개 비닐하우스로, 나중에는 대추분교로 그리고 지금은 천주교 공소 앞에 새로 조성한 평화동산으로 옮겼지만 한 번도 꺼진 적이 없다.

집회 초기 땅의 정직함만을 믿고 평생 농투성이로 살아온 늙은 농민들은 미국과 정부라는 거대 공룡 앞에 작은 토끼처럼 여렸다. 두려움에 떠는 주먹을 머리 위로 치켜들 줄도 그렇다고 힘차게 구호를 외치지도 못했다. 하지만 집회가 100일, 200일, 600일, 700일을 넘기면서 그들은 전사가 되어갔다.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처럼 주민들은 투쟁을 통해 단련된 것이다.

평택지방은 유배된 민중들의 땅


평택지방은 민중의 땅이다. 이것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다. 지금은 수천만 평의 너른 평택평야가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지만 이 땅은 본디 기름진 옥토가 아니었다. 내륙 깊숙이 바닷물이 유입되고 광활한 간석지가 펼쳐진 천형의 땅. 그래서 경작할 땅이 부족했고, 물을 얻기가 어려웠으며, 농사를 지어도 3년에 한 번 수확하면 다행이라고 할 정도로 척박한 땅이 평택지방이었다.

하늘만 바라보다 모내기철을 놓친 농민들은 호미모를 심거나 메밀을 심어 연명하였다. 그래서 늦여름이면 달빛에 비친 광활한 들판은 눈 내린 새벽처럼 하얗게 빛났다. ‘녹두밭 윗머리’라고 불렸던 구릉지대는 땅이 메말라 경작이 어려웠으며, 겨울이면 고니가 떼를 지어 날아드는 저습지는 물이 너무 많아 농사를 망쳤다. 오성들은 10리·20리 밖에서 물을 끌어들여 식수와 농업용수로 사용하느라 골이 빠졌고, 산간지대는 호미도 들어가지 않는 딱딱한 땅을 김매기 하느라 손바닥이 갈라졌다.


조선시대에는 우박과 해일의 피해가 심했으며, 서울과 가까운데다 도로와 ·수로 교통이 발달해 지배층의 탐학과 전쟁의 피해도 컸다. 평궁리들, 개화리들, 중심리들, 오성들, 번개들과 같은 광활한 땅은 일찌감치 궁궐이나 왕족들이 차지하였고 농민들은 지주와 마름의 수탈에 시달리며 소작을 지어 근근이 생명을 부지했다. 고려시대 부곡(部曲)이었던 송탄 이충동 일대와 서탄면, 포승면 일원은 일반군현보다 더 많은 조세와 부역을 감당하였으며, 조선시대 국영 목장이 있었던 포승면 홍원리, 석정리와 원정리 일대 민중들은 목부(牧夫)로 천한 역에 시달렸다.

삼국시대부터 크고 작은 전쟁에 시달렸던 평택지방은 고려 후기 몽골과 왜구의 침입으로 쑥밭이 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때는 평택현이 있던 팽성읍이 약탈되고 불탔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소사벌에서 명나라 군대와 왜군이 대회전을 벌였다. 근대시기 청일전쟁의 중심도 이곳이었으며 후방이었으면서도 한국전쟁의 피해를 많이 입은 곳도 평택이었다. 이처럼 근대 이전 평택지방은 경제기반이 취약하고 생산력이 낮았으며 서울과 가까워 권력층의 탐학과 수탈이 심한 지역이었다.

이 같은 천형의 땅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자기 땅에서조차 유배(流配) 당한 사람들이었다. 거친 기장밥이라도 끼니를 굶지 않으면 하늘에 감사할 줄 아는 기층 민중들. 그들은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을 구하러 바닷가까지 왔다가 정착하였고, 황해도에서 피난 내려와 한 발짝이라도 고향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기 위해 정착하였으며, 땅값이 헐하다고 하여 고향 땅 처분하고 찾아들었고, 빚 받으러 왔다가 돌아가지 않고 눌러앉았으며, 주인집 딸과 눈이 맞아 세경으로 받은 돈을 들고 뛰쳐나온 사람도 있었다.

사연도 가지가지였던 그들은 버려진 갯벌에 원둑을 쌓아 개간을 시작하였다. 도구래야 가래, 삽, 들것, 지게 같은 허접한 것이었지만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소사벌, 평궁리들, 번개들, 오성들, 그리고 미군기지에 수용예정인 금각들과 도두리들, 가난한 민중의 땅.

도두리벌, 황새울벌을 메워 옥토를 일구다

도두리벌은 4백 여 만평의 농경지를 보유하고 있다. 농경지가 형성되기 전 이 곳은 갯벌과 갯고랑이었고 나루와 포구가 발달했다. 곤지머리나루는 삼국시대부터 안성천 건너 계두진으로 넘어가는 수로교통과 어업의 중심이었으며, 노양리 경양포는 고려시대에 가장 큰 조창이었다. 그러다가 근대들어 조수간만의 차에 따른 침식작용으로 갯벌이 메워지고 토사가 쌓이면서 나루와 포구는 기능을 상실하고 황무지가 되었다.

나루와 포구의 기능을 상실한 황무지가 광활한 옥토가 된 것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뒤의 간척사업 때문이다. 자기 땅에서 유배되어 정처 없이 떠돌던 민중들은 맨손으로 산을 허물어 바다갈대 무성한 갯벌과 갯고랑을 메워나갔다. 그래서 만들어진 지명이 ‘보미사논’ ‘구원들’ ‘다섯 가래 논’이다. 보미사논은 봄에 개간한 논, 구원들은 아홉 개의 원둑을 쌓아 개간한 논, 다섯 가래 논은 가래 다섯 개로 개간한 논을 말한다.

간척은 한국전쟁 뒤 피난민 수용소가 세워지면서 더욱 촉진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밀려드는 피난민들을 간척이 가능한 황무지와 갯고랑 주변에 정착시켰다. 팽성읍에는 남산리, 석봉리, 신대리 일대에 수용소가 지어졌다. 도두리벌은 신대2리 영창마을과 3리 장단마을 사람들 그리고 1952년 미군기지 확장으로 고향을 빼앗긴 대추리 주민들이 참여했다.

지게로 흙을 져서 매워도 메워도 성공하지 못했던 도두리벌 갯골을 막은 것은 순전히 주민들의 땀과 인내심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땅에서 마저도 주인이 될 수 없었다. 해방 전후의 혼란기에 갯벌을 자기 땅으로 만들었던 땅주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갯골로 밀려드는 바닷물과 싸웠던 주민들은 이제 지주라는 이름을 가진 신종 유령들과 40년에 걸친 목숨을 건 싸움에 들어갔다.

대추리 주민들의 한, 그리고 의지

서러운 유배자들의 땅, 그 중심에 대추리의 눈물이 있다. 한국전쟁 전만 해도 마을이 크고 포실해서 부러움을 샀던 이 마을을 빼앗아간 것은 미군기지였다. 물론 미군기지 이전에도 일본해군시설대(302부대) 비행장이 있었지만 그 때는 마을까지 빼앗았던 건 아니다.

해방 뒤 거의 방치상태에 있던 일본군 비행장을 접수한 것은 미군이었다. 처음 미군은 경비병만 주둔시키고 기지 확장에 열의를 보인지 않았다. 그러다가 휴전협정이 진행 중이던 1952년 비행장을 다시 접수하면서 확장을 시작하였는데, 이 때부터 주민들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미군들은 활주로를 넓힌다며 옛 대추리 마을과 함정리 서원말 일부를 미군기지에 편입시켰다. 주민들의 생존권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전쟁 중이었고, 미국 때문에 정권이 유지되었다고 감사해 하는 이승만 정권 하에서 생존권 운운하는 것은 국가반역죄(?)에 버금가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정부와 미군은 짧은 이주기간을 정해주고 자진 철거를 종용하였다. 불응할 때는 당시만 해도 보기 힘들었던 중장비를 동원해 부숴버렸다. 이주대책이라는 것도 두 지게 분량의 목재, 두 집에 하나씩 천막 한 동, 보리쌀 한 가마가 전부였다. 주민들은 가까운 곤지머리에 새 둥지를 틀었다. 때는 늦가을이어서 가을걷이에도 바쁜 계절이었다. 낮에는 논밭에 나가 일하고 밤에는 부서진 집에서 목재를 날라다 집을 짓는 일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이렇게 100여 호가 넘는 새 동네가 만들어졌다. 옛날 뱃터를 중심으로 주막집 두 세 개뿐이었던 곤지머리에 새 동네가 만들어진 것이다.

새 동네는 만들어졌지만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대추리는 생산기반 대부분이 미군기지 안에 있었기 때문에 당장 농사지을 농지가 없었다. 이들은 대추리와 함정리 사이의 황새울들과 아직도 갯벌 상태로 남아 있었던 흑무개들에 눈을 돌렸다. 황새울들은 이주 전부터 간척이 됐지만 질퍽한 수렁이어서 가격이 헐했고, 흑무개들은 개간만 하면 내 땅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개간은 농사 일 짬짬이 진행됐다. 그래서 지명도 가을에 막았다고 ‘가을원’, 남쪽에 막았다고 ‘남원’, 당집 밑에 있다고 ‘당집원’, 갈대가 무성한 들을 막았다고 ‘갈대원’, 흥농계 사람들이 막았다고 ‘흥농계원’, 함정리 섬마을 사람들이 막았다고 '섬마을원’으로 지어졌다. 하지만 주민들은 이 땅마저도 온전히 자신들의 것으로 하지 못했다. 땅 주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땅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다. 심은 모를 뽑고 모내기를 막는 지주의 대리인들과 흙탕물을 뒤집어쓰며 싸웠다. 써레질한 무논에 들어가 뒹굴기도 했고 가진 자들이 좋아하는 법에도 호소했지만 권력도 법도 그들 편이 아니었다.

그렇게 지켜낸 땅이었다. 자식 같은 땅, 아니 자식보다 귀한 땅이 황새울들, 도두리들이었다. 그런데 피눈물 흘리며 세운 마을, 온 몸으로 일군 내 땅을 다시 내 놓으란다. 이제 자식들도 다 떠나고 늙은이들만 사는 동네에 남은 꿈이라고는 이웃들과 고향에서 살다가 묻히는 것 밖에 없는 농투성이들에게 다시 나가란다. 만년에 늙은 농부가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행복추구권조차 내 나라와 미국은 인정하지 않겠단다. 그래서 저녁이면 촛불을 켜든다. 촛불을 들고 평화공원으로 몰려든다. 승리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양보할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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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연구를 하고 있으며 평택인문연구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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